미학 오디세이 3

Element 2010. 3. 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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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과 2권을 다 읽은지 어언 1년이 지난 시점에 미학 오디세이 3권을 읽기 시작했다. 3권은 1권과 2권이 나온지 10년이 지난 후, 따로 나온 책이라 사실 미학 오디세이 별책으로 여겨야 할만한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에셔와 마그리트라는 두 인물로 풀어갔던 1,2권에 비해 피라네시라는 인물은 많이 약하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앞에 두 인물과는 다르게 그림 속에 담겨진 모순을 잘 보이지 않게 숨겨놓아서 그걸 찾기가 힘들었고, 더군다나 판화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림도 잘 보이지 않았다. 책 말미에서 왜 피라네시를 택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책의 전반적인 흥미를 반감시켰다는 데에서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려웠다.

책의 흥미진진함은 앞의 두 권에 비해 떨어지지만 말솜씨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미술을 여러가지 그림과 설명을 통해 풀어냈기에 완벽히 이해는 못해도 읽을 당시 고개를 끄떡이게는 된다. "시뮬라크르와 스뮬라시옹"에서 나오는 현실과 가상에 대한 이야기는 예술이 현실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닌 지금의 현실을 인식하고 재인식하게 하는 것임을 이야기 해준다. 가상이 현실을 뒤업고 가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우리는 결국 매트릭스를 알면서도 매트릭스 속에 살아가고 있을 뿐임을 다시 한번 인지해준다. 네오 매트릭스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보는 순간 또 다른 매트릭스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플라톤 : 그럼 내 말이 맞지 않나. 우리가 눈에 보는 현실은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
디오게 : 그렇게 되나?
플라톤 : 그게 삶이지. 언젠가는 참된 세계에서 깨어나기를 꿈꾸며 사는 것.......
디오게 : 하지만 그 세계도 또 다른 꿈일터. 그냥 거대한 우주의 바퀴를 굴리며 꿈속에서 함께 놀지 않으려나?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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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는 이야기 2008. 8. 16. 00:10
   요즘 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고민은 아무래도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현실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미래의 세상을 위해 이상을 따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의 말처럼 이상과 현실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 세상이 보편적으로 말하는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의 구분은 사실상 돈이 되는 것과 돈이 안되는 것에 대한 나눔일 것이다.
   중세의 사람들은 매일 같이 하늘이 무너지고 얼마 안가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무신론자에 음모론을 많이 들어서인지 혹은 주류의 세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서인지, 나는 인류가 안 좋은 길로 과장되게 말하자면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환경오염문제를 제쳐두더라도 돈에 보이는 석유문제는 인류의 암울한 현실이지만 사람들은 물처럼 무한하고 순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쓰고 있다. 중국과 신흥자원부국들이 석유소비를 늘리자 전세계는 독감에 걸린듯 고유가에 시름시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인들과 인도들 중에 미래에 차를 가지게 될 사람이 엄청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과연 우리가 자원을 무한하다고 가정하고 운영하는 경제체제가 옳은 것일까? 그렇게 믿었던 미국마져도 비틀거리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문제 뿐만 아니라, 내 미래의 직업에 대한 고민도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과학자라는 꿈을 거쳐 프로그래머(전산공학도)라는 길을 택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지고 깊어질수록 이 직업은 세상을 바꾸는 직업이 아니라 로또보다 훨씬 많은 확률로 대박을 노릴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돈으로 모든지(명예, 사랑, 우정, 권력 등등) 살수 있는 세상에 살기에 돈이 많아진다면 편해지겠지만, 그것이 꼭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원들과 몇몇 국민들만 칭송할 뿐 어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수 있을까? 역사적 소명은 무시한다해도 그 세상을 역행하는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8살 때, 백원짜리 하나를 손에 쥐고는 10원짜리 껌을 사먹을까, 아니면 사탕을 사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서있던 적이 있었다. 그 때가 돈에 대한 최초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보다 수십배, 수백배 많은 돈을 가져보았지만 그 때와 같은 행복감을 다시 느낀 적은 없었다. 나에 있어 돈은 통장 속에 적힌 숫자와 같았다. 아무리 큰 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큰 수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돈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보다 더 큰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론은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인간으로써는 그것을 증명할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든 학문중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논리학으로 판단을 하고 그 결과 모순이 발견되도 그 또한 인간의 범주 안에서 한 생각일 뿐이다. DNA가 100% 똑같은 일란성쌍둥이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조물주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우주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빅뱅(태양말고)을 생각해보자. 갑작스러운 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 없던 것에서 있던 것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없던 것을 만드는 방법을 단 한가지 알고 있다. 바로 만드는 것이다. 만든다는 것은 만드는 주체와 만들어지는 객체가 있어야 한다. 객체는 잘 알고 있듯이 우주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를 조물주(신)라고 부른다. 자, 그렇다면 조물주는 누가 만든 것일까? 끝이 없는 무한의 무한 반복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계속 반복하다보면 결국 무한대손이라는 결론과 같다. 결국 나란 존재는 누구에게 만들어진 수 많은 별들중에 살고 있는 한명인 것이다.

   현재 내 미래관을 말하자면, 어렸을 때 막연하게 꿈꾸던 행복한 미래는 없어진지 오래이고 지금 생각하는 현 세상이란 미래라는 안대를 차고 고요한 종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눈은 너무나도 근시안적이여서 눈 앞에 있는 미래라는 말밖에 읽지 못하고 있다. 정작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생각이나 고민은 하지 못한체 단순히 경제 수치라고 부르는 GDP숫자놀음만 하고 있다. 이러니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윤리인지도 모르고 단지 하나뿐인 지구에서 더 많은 생산만을 말하니 이게 멸망으로 가는 길이 아니면 무엇일까? 지금 우리가 한발 앞으로 진일보하고 있는 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까?.


   요즘 드는 확실한 생각은 하나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내가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이 나의 행동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옴기는 일은 확연히 다른 일이다. 여기서 내가 이 글에서 처음에 쓰려고자 했던 '이상'과 '현실'에 대한 괴리가 나온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 즉 내가 알고 있고 실천해야 할 일은 내 소유욕을 채우는 일이 아닌 세상을 행복으로 채우는 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 좋은 길로 가고 있다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다.
   반대로, 현실은 한국이 말하는(세상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건 너무 잔인하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더 큰 물질적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다. 한국에서의 행복의 척도는 돈으로 바뀌었다. 2001년 행복척도의 1위, 2위였던 건강과 가족의 행복은 돈에게 1위자리를 내주고야 말았다. SF소설 속 사회 같지만, 한국에서는 돈으로 물질은 물론 법도 생명도 살수 있기에 당연히 행복도 살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이 문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받았던 선택과 비슷하다. 빨간약을 먹으면 현실을 깨닫고 현실을 바꿀 수 있지만 그 현실은 힘겨울 것이다. 파란약을 먹으면 지금과 같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속에서 사육되고 있는 것조차 모른체 살다가 죽어가는 수 많은 사람 중에 한명일 뿐이다. 지금, 나는 무슨 약을 먹을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법칙이다
- 칸트의 실천이상비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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