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Element 2008. 9. 9. 17:20
   재미도 없고 교훈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 책에서 내가 느낀 유일한 장점은 민음사 판 책은 들고 다니기 편하다는 것 하나였다. 그 하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나는 서울을 갈 때나 집에 갈 때 항상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심지어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들고 다니면서 읽었고 아마 내가 앉아서 읽은 분량보다 이동하면서 읽은 분량이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장점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신랄한 비판에 들어가겠다.
   일단 나만의 생각뿐만 아니라 책을 읽은 여러 사람의 리뷰를 종합해본 결과, 이 책은 내가 읽기에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청소년 성장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은 초반부터 종반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주인공 홀든의 불평소리는 가뜩이나 뉴스들로 심란한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지적인 대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이 지적인 대화(서로 충분한 사전지식이 필요한)를 하려고 하면 어려운 말을 하고 지겨운 소리만 한다면서 핀잔을 부린다. 그건 아마 어느덧 나이를 먹어버린 내가 사춘기를 겪는 고등학생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1940년도에 태어나신 분과의 시대차이일지도.

   유통기한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원작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책의 번역이 거지 같았다. 작품의 후반에 홀든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을 찾아가 그 선생님 댁에서 잠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없이 우울한 홀든에게도 좋은 선생님이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대목이었는데 갑자기 그 선생님이 자고 있는 홀든의 '귀두'를 만지면서 소설은 청소년 성장소설에서 청소년 성범죄소설로 급변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전계였다. 새벽에 전화한 홀든의 전화를 아무런 짜증 없이 받고 홀든을 위해 좋은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해준 선생님이 갑자기 성범죄자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홀든은 그 일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선생님께 서둘러 인사를 올린 후 그 집에서 뛰쳐나온다. 방황하던 홀든이 좋은 선생님 덕분에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홀든 식으로 말하자면) 빌어먹을 따분하기만한 고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기차역에서 혼자 생각을 하던 홀든은 선생님께 너무 무례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자는 학생의 머리를 만지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을 거 같은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마음을 먹는다. 분명히, 앞에서 선생님이 '귀두'를 만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머리를 만진 것으로 내용이 바뀌어 버렸다. 둘 다 머리지만 그 머리와 이 머리는 판이하다.
   한 권의 책 속에서 주인공이 몇 페이지를 두고 주장을 번복하자 책에 대해 의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의심은 민음사 판 번역자의 실수로 판명났다. 앞에서 나온 '귀두'는 원서에서 'Head'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자가 홀든이 느낀 성적수치감을 좀 더 실감 나게 표현하려고 '귀두'로 번역해버렸다. 이렇게 치명적인 번역실수가 드러나는 곳은 이 장면이 끝이 아니다.
   작품 종반에 홀든이 집으로 몰래 들어가 여동생인 피비와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라고 할 수 있어! 분명히 그래. 어째서 아니라고 하는 거니? 정말 사람들은 실제적인 걸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정말 환장하겠다"라고 홀든이 말하자. 피비는 "그렇게 욕 좀 하지마. 좋아. 그럼 다른걸 말해 줘.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 건지 말이야. 예를 들면 과학자나 변호사 같은 거"라고 말한다. 욕도 안 했는데 피비가 "욕 좀 하지마"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청소년권장도서로 선정돼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도 청소년에 맞춰 자체검열을 한 것인지 욕도 안 했는데 욕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었다. 아마 초반부터 홀든의 대화나 회상 대부분은 욕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욕은 교묘하게 숨겨버린 채 주인공을 욕도 안 하는 선량한 학생으로 만들어버렸다. 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중요한데 번역자 마음대로 소설 속 상황을 변질시켜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책을 읽을수록 철 없고 바보 같은 홀든이 지금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인 사람과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보다는 지적인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지적인 대화보다는 즐거운 대화를 원한다. 더군다나 지적이지도 못하다 (책은 언제 읽나? ㅠㅠ). 불의를 알지만 참는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 속에서는 슈퍼맨처럼 당당하다. 물질적인 욕심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스스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 속에 살고 있다. 결국, 홀든에 했던 나의 비난은 책의 중반 이후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딱 누워서 침 뱉기.
   나쁘기 만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웃으면서도, 순수하다고 또 한 번 웃는다.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세상 모든 동전에 앞면과 뒷면,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명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적어준 앤톨리니 선생(앞에서 언급한)이 적어준 쪽지는 어떤 사람에게는 교훈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에게는 (다시 홀든 식으로 말하자면) 구역질이 난다. 인식의 차이도 있겠지만 묵묵하게 일한다는 것은 고대에는 노예에게, 중세에는 농노에게 그리고 근대에는 노동자에게 갑이 해줄 만한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일하게 즐거웠던 것은 홀든의 여동생 피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순수하면서도 여자아이처럼 귀여우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배려심까지 가진 엄마친구여동생 같은 인물이었다. 피비를 보면서(읽으면서) 나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그럴 때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택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일까.

ps. 오랜만에 맞춤법검사를 해봤는데 또 다시 폭탄을 맞았다. 블로그에 글 쓸때도 한글로 먼저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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