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

생각하기 2009. 7. 6. 21:13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자체를 취미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평범한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보는 영화가 모두 재미있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화들이 있고 그 중에는 재미 있는 영화도 있고 작품성 있는 영화도 있고 보면 시간 아깝다는 생각만 드는 영화도 있다.
그런 영화들 중에서 어떤 영화를 볼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호감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영화를 보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선택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접할 때가 있다.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주말에 할일이 없기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다.
비록 영화가 재미없을 것이라고 예상은 되지만 원칙적으로나마 문화생활을 할 수 있기에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은 때울 수는 있지만, 반대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곳에 돈이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진정성도 없는 일에 왜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 영화들이 과연 자신의 필모그래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가치관의 차이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영화 평론가들은 별점을 하나밖에 안주는 한이 있더라도 개봉하는 대부분의 영화를 보려고 한다.
잘못된 영화를 보면 볼수록 잘된 영화가 어떤 면에서 잘되었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영화라 직업이 아니라 취미의 하나 일뿐이다.
즉,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나의 모든 시간과 열정과 돈을 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내 모든 열정과 시간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다고 확신이 되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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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꼴

생각하기 2009. 1. 24. 00:13
눈이 닮았다.
코가 닮았다.
입술이 닮았다.
머리가 닮았다.
체형이 닮았다.
더 이상은 없을까?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배운건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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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자

사는 이야기 2008. 10. 23. 22:13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우후후)
죽을만큼 뛰다가는(우후후)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우후후 아 아)
고양이 한마리도 못보고 지나치겠네

         장기하와 얼굴들, '느리게 걷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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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것도 손에 안잡힌다.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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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거리다

생각하기 2008. 5. 3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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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자 속 생각

생각하기 2008. 5. 14. 19:22

이곳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심심하다.
빛도 희미하게 보이고 내 심장 소리와 공명하는 또 하나의 심장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는 나를 가둔 이 작은 방안의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닐 준비를 하려고 발길질 연습도 해본다.
언제쯤 그날이 오게 될까?


내가 작은 방에서 밖으로 나온 지도 어느덧 362일 정도가 지났다.
기대한 대로 바깥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방안 있을 때는 밖에 나가면 바로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오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1초에 한 번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고 밥을 먹으면 진이 빠져 온종일 잠만 자야했다.
수천 번 넘어진 끝에 이제야 기어다니는 것을 벗어나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롭게 걷게 되고 뛸 수도 있게 되면 새로운 것을 자주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만져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새로움의 연속이며 미래는 더 즐거울 뿐이다.


새로움을 느끼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했다.
대학에서 자유롭게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여행을 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손쉽게 친구사이가 되었다.
이제 내가 접해보지 않는 것은 작게는 몇 년 많게는 몇 십년 선배들이 계시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해보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변화를 원하고 원했지만, 그 일을 하려고 공부를 해왔지만, 드디어 내가 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선배들과 함께하는 직장생활도 즐거웠던 예전 일들처럼 기대된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더 행복한 세상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도전했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던 내가 어느 순간 변화에 대해 낫을 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고,
열심히 일한 끝에 새집과 새 차 그리고 내 아이들을 얻게 되었다.
학창시절 가지고 있던 많은 별명을 불러주는 것은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과 있을 때뿐이었다.
24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었고 몇 년에 한 번씩 바뀌는 것은 뒤에 붙는 직급뿐이다.
지구처럼 달처럼 반복적인 내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게 되었고 변화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사라졌다.


지금은 여행을 가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가고 나도 잘 아는 유명한 관광지가 좋다.
그런 관광지라면 패키지여행이 아주 많기에 유명 문화재들을 아주 편하고 빠르게 관광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주는 얼마 되지 않는 휴가에 여행하고 남은 시간 안락한 집에서 편히 쉬려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지인들을 위한 선물을 잊지 않는 것이다.
벌써 알고 지낸 지 몇 십년이나 된그들은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꼭 챙겨야 한다.


어느덧, 내가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나의 지인들도 벌써 반이나 줄어들었고 직장을 가지면서 작아졌던 나의 활동범위도 퇴직하면서 더 작아졌다.
지난 10년간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집 근처에 사는 이웃 또는 나의 아들 딸들이 낳은 손자, 손녀들뿐이다.
가끔 건강을 위해 집 밖으로 산책하러 나가지만 대부분 시간은 집안에서 보낸다.
바깥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조용하고 편안한 집이 가장 좋은 휴식처다.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한 나는 얼마 전 네모난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나 혼자밖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어둡고 고요한 이곳에 들어오니 불연 듯, 태어나기 전 엄마 집에서 살았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심심한 곳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발길질을 했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 후, 누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배웠었다.
새로움이란 내가 배 속을 나온 원동력이었고 나를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가졌던 호기심을 포기하고 새로움을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지금과 같은 어둡고 작은 상자에 갇혀 버린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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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것에 대하여2

생각하기 2008. 4. 17. 00:17

첫번째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혹시 첫번째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그 글부터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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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배정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시작이 좋지는 못했다.
같은 반에서 5명밖에 안되는 친구가 같이 진학하였고, 그 중 친하던 친구들(10명) 중 아무도 나와 같은 중학교로 가지 못했다.
진학이었지만 사실상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나는 3반에 배정되었다. 3개 반중에 가장 마지막 반에 배정 된 것이다.
3월 2일, 첫 수업시간에 매번 하는 행동 중 하나인 키순대로 줄서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중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고 (다른 친구들도 물론) 결국 중간쯤의 번호를 배정 받았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1번은 우리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아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착하다는 생각을 바꾸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친구였다.
예전 글(글 보기)에서 언급했듯이, 중학교는 처음으로 맞이한 혼란의 시기였다.
6년간 사귀었던 친구들과 서로 헤어져 처음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야하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마냥 착하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어정쩡한 성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관계들은,
맑던 물통 속에 갑자기 색색의 붓들이 들어와 복잡하게 섞여져버린 듯, 쉽게 어두워지고 탁해지고 만다.

결국, 우리는 만난지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친구 한명을 왕따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느 누가 시켜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친구는 가장 키가 작았고 공부도 못했기에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우리의 표적이 된 것 뿐이었다.

서로 즐겁게 뛰어놀던 아이들은 한명을 슬프게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즐거움을 느끼던 행동들이 어느 덧 습관이 되어 버렸을 땐, 그 아이는 매일 교실에서 우는 아이가 되었다.
착하다는 이야기를 듣는게 최우선이었고 그게 몸에 베어있었던 나는 그 아이가 울때면 가서 달레주었다.
그리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행상을 받았다.

상은 받았지만, 마음이 석연치는 않았다.
나의 행동을 선행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의 슬픔에 내가 공감해서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착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란게 더 컸다.
또한, 비록 내가 그를 위로해주긴 했지만, 나도 그가 괴롭힘을 받는 것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방관자 중 하나였다.
반 친구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를 왕따하는 분위기였지만, 나에게는 그 잘못을 막을 용기가 없었다.
나도 잘못을 알면서 그 잘못을 막지 못하는 수 많은 방관자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다.
내가 '착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덕분에 상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 때문에 나는 지쳐갔다.
2학기가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를 위로해주는 일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는 예전처럼 매일 울었고, 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를 외면한체 다수의 친구들 속에 놀았다.


착하다를 바보같다와 동일시하는 어른들을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 였다.
어떤 이 사람이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말한 사람이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었다.
도덕적인 잣대는 내팽겨쳐진지 오래였고, 오직 이익의 잣대만으로 사람들을 비교할 뿐이었다.

착하다는 것이 결국 나에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어린이 신문 1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너만 생각해라, 돈을 벌어라'라는 시대적 과업을 인식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고 하였던가?
그 날 이후로,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하기 보다 어렵던 입에서 욕을 내뱉기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중1 땐, 친구들이 나에게 욕을 한번 해보라고 하면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를 말하는 것 같은 어색한 발음 때문에 웃음을 자아냈던 내가,
이제는 한국인들이 듣고 '완벽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억양의 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한다는 건 아니고)



나는 나쁜 아이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착한 아이도 아니었다.
분명, 이 일이 없었더라도 '착한 아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아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착한 어른'라는 말은 거의 못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수업만 충실히 들으면 따라갈 수 있다는 초등학교 교과과정은 어린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아이가 도덕적인 아이로 커나가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게 내려지는 지시나 금지를 철저히 지키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이라는 것은 단지 지시나 금지를 지키는 것 이전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한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일단, 착한 아이가 되어 착하는 말과 옳고 그름 사이에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관련된 내용을 곧 포스팅 할 예정)

어른이 된 나에게 필요한 것도 어렸을 때와 같은 막연한 착함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도덕성일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 슬픔을 주게 되더라도 합당한 원칙에 의하는 도덕적인 삶.
이런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간다면,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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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2008. 3. 3. 22:25

동화책나 교과서를 보면 자라나는 아이에게 착하다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백색처럼 어느 것 하나 티가 없어 보이는 이 '착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렸을 적 나는 무척 착하게 살았다.
스스로 착했다고 말하는게 우숩긴 하지만, 머리 속에 착한 행동을 인생의 제1목표로 두고 살았으니,
아무런 생각없이, 모든 행동이나 말이 착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만큼 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착함이라는 뜻에서 벗어난 몇가지 행동들도 종종하긴 했지만 말이다.

동생이 태어나고, 방황하던 나에게 부모님이 던진 당근은 '착하다'는 말이었다.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동생에게 가는 이야기는 옛날에도 회자 되었고 요즘 어린이 TV에서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은 나에게 착하다는 칭찬으로 나의 생각을 돌려 놓았다.

대략 진행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1. 착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하신다.
2.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3. 칭찬을 받기 위해 계속 착한 행동만 하려고 한다.
4. 동생을 잘 보살피면, 칭찬을 해주신다.
5.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는게 착한 행동으로 각인된다.
6. 동생과 다툴일이 있으면 져버린다.
7. 결국, 착하다는게 인생의 제1목표가 되어버린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동생과 싸우는 것보다 지는편이 더 좋다고 인식을 한 후, 계속 지는 척 했던거 같다. (스스로 때리고 혼자 아픈척함)
기억의 단편으로는 가끔 화가 나서 무기를 든적이 있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속 해주시는 칭찬,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라는 말은 우리를 싸우지 못하게 했던 거 같다.
어쨌든, 숙제를 베끼기 싫어, 차라리 매를 택할 만큼 착하다는 말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그 중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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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은 2편에서.
(글을 읽을 확률과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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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사는 이야기 2008. 2. 9. 00:22
1. 지난 한달동안의 인턴을 말하자면, 반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거 같다.
   처음에 계획하고 제안했던 스케치로 모든 그림을 찾아내는 원대한 프로젝트는 힘들듯 싶지만,
   새로운 생활, 즉 대학원에서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선배들을 통해서 여러가지를 배울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대학원에 가서 하고 싶은 전공분야에 대한 방향을 잡는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덧 터닝포인트를 지나, 목적지로 달려가고 있는 이 일 남은 일주일 열심히해서 안전하게 착륙시키겠다.

2. 고민 위에 서있다.
   사실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갖기란 불가능하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두어번 본 검은 주머니 속에
   빨간공이 들어 있을지, 파란공이 들어 있을지 혹은 두 공 모두 들어있을지 아는 것이란,
   내가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예상하는 것만큼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기에, 나는 일단 그 공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지금은 인간과는 땔 수 없는 불을 발견한 최초의 인류와 같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안고서.

3. '누군가 말했지 인생은 타이밍, 하지만 난 달라. 내 인생은 라이밍'
   같은 가사를 쓰겠다고 메모지에 끄적끄적 적던게 엇그제 같은데 그 메모지를 잃어버렸다.
   독보적이 아닌, 듣보잡이라도 내 가사를 듣고 잡다.

4.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을 경우, 몰래 말해야 한다.
   그 때문에 지금 짧은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5. 지구에 생명을 주는 태양을 나는 내가 해바라기라도 된 듯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아무리 태양을 좋아할지라도 때때로는 태양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차가운 겨울에 받는 햇살은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편하다.
   그러나 끈쩍끈쩍한 습기로 가득찬 무더운 여름날의 햇살은 피하고 싶은 그 자체가 된다.
   이 추운 겨울 속에서, 그 피하고 싶은 덥고 짜증이 나는 햇살을 느꼈다.
   태양이 10여가지 별중 하나에 불과한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이 작은 사람의 불평을 알리가 없다.
   내가 여기서 소리친다고 한들 그게 저 먼곳까지 들리겠는가?
   혹시 들린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라면, 그늘에 숨는 것, 서쪽으로 달리는 것 혹은 태양을 지우는 것 중 하나.

6.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공연에서 커다란 실망감을 얻었다.
   아무리 클럽에서 하는 공연이라고 하지만, 공연 전문으로 세팅된 무대가 사운드 세팅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귀의 음량폭을 초과하는 소리 덕분에 새하얀 화이트 홀로 가득한 사진 같은 노래를 듣게 되어 몹시 짜증났다.
   여지것 다녀본, 5번 남짓한 공연에서 내가 보고 싶은 MC들을 대부분 보았었기에 직접 보고 싶은 열망도 없었다.
   지난 1년간 품어왔던 열정을 그 곳에서 낳은 새하얀 컨버스에 담아 다른 곳으로 옴겨야 할것 같다.

7.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
   그 변화가 좋은 변화가 될지, 나쁜 변화가 될지 단정짓지는 않겠다.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4년 전, 나는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행동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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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사는 이야기 2007. 6. 12. 02:23
매번 생각만 한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옴기지 못한다.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 아니였나?

오늘도 망상 속에서 아무것도 부여잡지 못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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