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생각하기 2009. 4. 30. 22:15
미용실과는 다르게 남자들은 자기가 가던 이발소을 왠만해서는 바꾸는 법이 없다. 머리 같은 거에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하지 않을 뿐더러 어짜피 이전과 같은 짧은 머리를 원하기에 굳이 바꾸질 않는다. 물론, 나도 남자인 아버지를 따라 딱 2군데 이발소만을 줄기차게 다녔다. 왜 이발소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냐면 내가 그 기간에 동안에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아참, 요즘 이발관이 어디있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어린이날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옛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이사를 온지 얼마 안되서 우리 가족은 10년동안 가던 목욕탕 밑 이발소에서 집앞에 있는 이발소로 머리 깎는 곳을 옴겼다. 처음 보는 이발사 아저씨 얼굴이 어색했지만 그 전 이발소에서는 나오지 않는 따뜻한 물이 잘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동내가 크지 않고 매번 올 때마다 삼부자가 같이 머리를 깍았기 때문에, 이발사 아저씨는 우리 가족을 금새 기억하셨고 붙임성이 좋으신 아버지는 아저씨와 금방 친해지셨다.

여름이 되기 전이었으니, 아마 이 맘때 쯤이었을 것이다. 이발사 아저씨는 서해바다 어딘가에 있는 섬에 있는 자신의 팬션에 여름마다 놀러간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여름에 자신의 팬션을 빌려줄테니 그곳에서 한 일주일 정도 놀다오라고 말하셨다. 여름에 가족 여행을 갈곳을 찾고 있었기에 우리는 흔쾌히 아저씨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나는 한동안 서해바다 어딘가에 떠 있을 섬과 팬션을 생각하며 즐거워 했던거 같다.

아쉽게도 우리 가족은 아저씨의 팬션으로 놀러가질 못했다. 여름이 오기전 아저씨는 지병이 생기셔서 이발소 잠시 닫으셔야 했고, 내 머리속에 팬션이 점점 더 또렸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아저씨는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이발소를 간 것도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미용실을 가서 걱정이라는 뉴스와 함께 나도 이발소로의 발길을 끊었다.

그 이후로는 학교 친구들 혹은 홀로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로, 지금은 "머리 깍으러"라는 아무도 공적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곳에 가서 머리를 깎는다. 그 곳의 종업원들은 내가 들어올 때마다 다 같이 인사를 하고 머리를 깍아준 후에는 명함까지 손에 쥐어주지만, 나는 종업원과 손님 이상의 어떠한 정도 느껴보질 못했고 그 때문에 손에 쥐어준 명함을 써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제 길거리에서 예전과 같은 이발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자를거라는 상상조차 하기도 힘들다.
결국 지난 10년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떠돌 것이다.
서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속 팬션이 아직까지 내 머리 속에 떠돌고 있는 것처럼.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