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것에 대하여2

생각하기 2008. 4. 17. 00:17

첫번째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혹시 첫번째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그 글부터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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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배정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시작이 좋지는 못했다.
같은 반에서 5명밖에 안되는 친구가 같이 진학하였고, 그 중 친하던 친구들(10명) 중 아무도 나와 같은 중학교로 가지 못했다.
진학이었지만 사실상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나는 3반에 배정되었다. 3개 반중에 가장 마지막 반에 배정 된 것이다.
3월 2일, 첫 수업시간에 매번 하는 행동 중 하나인 키순대로 줄서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중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고 (다른 친구들도 물론) 결국 중간쯤의 번호를 배정 받았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1번은 우리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아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착하다는 생각을 바꾸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친구였다.
예전 글(글 보기)에서 언급했듯이, 중학교는 처음으로 맞이한 혼란의 시기였다.
6년간 사귀었던 친구들과 서로 헤어져 처음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야하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마냥 착하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어정쩡한 성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관계들은,
맑던 물통 속에 갑자기 색색의 붓들이 들어와 복잡하게 섞여져버린 듯, 쉽게 어두워지고 탁해지고 만다.

결국, 우리는 만난지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친구 한명을 왕따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느 누가 시켜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친구는 가장 키가 작았고 공부도 못했기에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우리의 표적이 된 것 뿐이었다.

서로 즐겁게 뛰어놀던 아이들은 한명을 슬프게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즐거움을 느끼던 행동들이 어느 덧 습관이 되어 버렸을 땐, 그 아이는 매일 교실에서 우는 아이가 되었다.
착하다는 이야기를 듣는게 최우선이었고 그게 몸에 베어있었던 나는 그 아이가 울때면 가서 달레주었다.
그리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행상을 받았다.

상은 받았지만, 마음이 석연치는 않았다.
나의 행동을 선행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의 슬픔에 내가 공감해서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착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란게 더 컸다.
또한, 비록 내가 그를 위로해주긴 했지만, 나도 그가 괴롭힘을 받는 것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방관자 중 하나였다.
반 친구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를 왕따하는 분위기였지만, 나에게는 그 잘못을 막을 용기가 없었다.
나도 잘못을 알면서 그 잘못을 막지 못하는 수 많은 방관자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다.
내가 '착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덕분에 상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 때문에 나는 지쳐갔다.
2학기가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를 위로해주는 일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는 예전처럼 매일 울었고, 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를 외면한체 다수의 친구들 속에 놀았다.


착하다를 바보같다와 동일시하는 어른들을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 였다.
어떤 이 사람이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말한 사람이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었다.
도덕적인 잣대는 내팽겨쳐진지 오래였고, 오직 이익의 잣대만으로 사람들을 비교할 뿐이었다.

착하다는 것이 결국 나에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어린이 신문 1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너만 생각해라, 돈을 벌어라'라는 시대적 과업을 인식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고 하였던가?
그 날 이후로,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하기 보다 어렵던 입에서 욕을 내뱉기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중1 땐, 친구들이 나에게 욕을 한번 해보라고 하면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를 말하는 것 같은 어색한 발음 때문에 웃음을 자아냈던 내가,
이제는 한국인들이 듣고 '완벽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억양의 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한다는 건 아니고)



나는 나쁜 아이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착한 아이도 아니었다.
분명, 이 일이 없었더라도 '착한 아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아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착한 어른'라는 말은 거의 못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수업만 충실히 들으면 따라갈 수 있다는 초등학교 교과과정은 어린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아이가 도덕적인 아이로 커나가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게 내려지는 지시나 금지를 철저히 지키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이라는 것은 단지 지시나 금지를 지키는 것 이전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한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일단, 착한 아이가 되어 착하는 말과 옳고 그름 사이에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관련된 내용을 곧 포스팅 할 예정)

어른이 된 나에게 필요한 것도 어렸을 때와 같은 막연한 착함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도덕성일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 슬픔을 주게 되더라도 합당한 원칙에 의하는 도덕적인 삶.
이런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간다면,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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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2008. 3. 3. 22:25

동화책나 교과서를 보면 자라나는 아이에게 착하다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백색처럼 어느 것 하나 티가 없어 보이는 이 '착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렸을 적 나는 무척 착하게 살았다.
스스로 착했다고 말하는게 우숩긴 하지만, 머리 속에 착한 행동을 인생의 제1목표로 두고 살았으니,
아무런 생각없이, 모든 행동이나 말이 착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만큼 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착함이라는 뜻에서 벗어난 몇가지 행동들도 종종하긴 했지만 말이다.

동생이 태어나고, 방황하던 나에게 부모님이 던진 당근은 '착하다'는 말이었다.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동생에게 가는 이야기는 옛날에도 회자 되었고 요즘 어린이 TV에서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은 나에게 착하다는 칭찬으로 나의 생각을 돌려 놓았다.

대략 진행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1. 착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하신다.
2.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3. 칭찬을 받기 위해 계속 착한 행동만 하려고 한다.
4. 동생을 잘 보살피면, 칭찬을 해주신다.
5.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는게 착한 행동으로 각인된다.
6. 동생과 다툴일이 있으면 져버린다.
7. 결국, 착하다는게 인생의 제1목표가 되어버린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동생과 싸우는 것보다 지는편이 더 좋다고 인식을 한 후, 계속 지는 척 했던거 같다. (스스로 때리고 혼자 아픈척함)
기억의 단편으로는 가끔 화가 나서 무기를 든적이 있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속 해주시는 칭찬,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라는 말은 우리를 싸우지 못하게 했던 거 같다.
어쨌든, 숙제를 베끼기 싫어, 차라리 매를 택할 만큼 착하다는 말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그 중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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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은 2편에서.
(글을 읽을 확률과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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