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표류기

Element 2009. 4. 20. 20:59
내가 글쓰기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허지웅이다.
예전 썼던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글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재미와 생각을 동시에 주는 놀라운 매력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그의 책을 사게 된것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지웅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두 단어로 말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와 "슬픔"

허지웅은 글을 재미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유식함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가 아닌 읽는 이들의 재미를 느끼기 위한 수사를 쓴다.
그와 동시에 그 재미는 현재 시대상황을 풍자한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슬픔이었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고시원 방이 좁은 건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1-2평 남짓의 작은 골방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바닥에 누우려면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야 다리를 온전히 다 뻗을 수 있다는 것 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 거대한 나무뿌리처럼 기둥하나가 서있을 거야, 라는 말 따윈 들어본 적이 없다. 여러모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내가 니 애미다"라고 말해놓고 아차, 싶은 다스 베이더의 심정이다. 여기서 자려면 복부에 구멍을 만들던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기둥을 안고 자던지 해야겠다. 직립보행을 포기한 짐승의 눈빛으로 원장을 향해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원장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에어컨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게 15만원짜리 방이고. 다른 방은 20만원부터 시작이야."

그의 글은 현 20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논스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천국 같은 20대의 모습이 아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수 많은 차들 중 단 하나도 가질 수 없는 20대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그에게서 슬픔을 느꼈던 이유는 그의 글 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20대인 나 자신에게 있었다.

슬픔이 사라졌다.
허지웅 블로그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책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글이었다.
(단 한가지 글은 확실히 블로그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이 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살만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의 글을 읽었을 때는 예전과 같은 슬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처한 상황, 즉 지금 20대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모습들이 지금은 슬프다고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년 생긴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예전에는 비극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던 내용들이 이제는 현실 그 자체로 인식하기에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왜 나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뚜벅이로 다녀야 하지?"라는 우울한 질문을 했다면,
이제는 "원래 20대의 삶이란 그러하다. 내 스스로 집을 마련하고 내 힘으로 나 하나를 먹여살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라는 식이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낙관적이라는 말과 긍정적이라는 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긍정이라는 안 좋은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보는 방향이지, 현 상황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은 착하고 멋지시네요"라고 말한다고 한들,
내가 착했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은 것처럼.
우리 세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있어야지만 그에 대한 대안과 방안을 찾아내 진정한 긍정을 이끌 수 있다.


......(생략)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평균적인 삶이라는 허상을 좇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기는 습관이나 저기 저 거대한 우주의 시크릿,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이나 저기 저 거대한 우주의 시크릿,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 따위 몰라도 건강하게 살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합니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거지요. 산속에 들어가서 풀뿌리 캐 먹고 살자는 게 아니고요, 그저 소박하게 남들 다 하는 거 꼭 다 할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살자는 겁니다.
   이런 결론에 닿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아마도 20대 전부를 통틀어 이 고민을 푸는 데 쓴 것 같네요. 선택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부채 위에 아슬아슬 쌓아 올린 세상의 빤한 삶으로 어서 들어오시라, 손짓만 했을 뿐이거든요.

나는 종교가 없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이야기를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마다 율법이 다르고 숭배하는 얼굴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이야기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착하고 선하게 살라"

성공에 대한 경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의 기준으로 보기엔 허지웅의 말은 다소 이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인류의 97%가 믿는다는 종교들에서 한결 같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지킨다는 아주 평범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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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생각하기 2008. 6. 4. 08:00
   허지웅, 그를 알게 된 것은 오로지 우연이였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알아보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김규항과 진중권을 존경하는 선생...'이라는 부근이 발견되 들어가게 된 글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의 블로그에는 2004년부터 쓰기 시작한 꽤 많은 양의 글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첫번째 보게 된 글의 말미에는 GQ 11월호에 실린 글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었다. GQ의 칼럼리스트 = 허지웅,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내가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놓고 정작은 싫어하는 잡지 GQ. 그 잡지를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대한민국에서 이름모를 가난한 개발도상국이 되어버린다. 한벌에 천만원이 넘는 정장을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모습을 보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혼자 붕어빵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런 잡지의 칼럼리스트, 그는 분명 최소 백만원이 넘는 정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글이 CQ 같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다시 앞줄의 연행이 시작됐다. 옆에 김작가 형이 끌려갔다. 나도 끌려갔다. 어깨를 잡혀 끌려가는 도중 뒤 쪽에서 누군가 당겨 몸이 허공에 떴다.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몸이 땅에 닿자마자 군화발이 날아들었다. 머리도 잡아당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때립니까. 어휴 진짜 아파서. 그렇게 당기고 끌려 우체국 앞까지 밀려갔다. 더 이상 날 끌고 갈 의지가 없었던지, 정신을 찾고 보니 도로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 선, 어느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내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다. 왜 사람 머리를 잡아당깁니까. 아끼는 겉옷이 찢어져 걸레가 됐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검지 손톱 절반이 씹혀 너덜거리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땀을 닦다가 뺨에 온통 피가 묻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바람에 알았다. 겸연쩍었다. 나는 람보가 아니다. 그래도 꽁지머리를 지탱하던 고무줄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난 간지남인데. 어디 거울 없나. 처량해서 처연하다.

허지웅의 블로그, '25일 새벽 청계 광장' 중에서

   그는 글을 잘 썼다. 다만 블로그의 분위기처럼 어둡고 쓸쓸했다. '고시원에서부터 온 편지'과 '20대가 사라졌다' 같은 몇개의 글을 더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그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고시원에 살다, 반지하빌라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란 알았다. GQ뿐만 아니라, 프리미어 같은 잡지에 기고를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의 의심도 풀렸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는 순간 행복이 사라지듯, 나의 기쁨에도 문제가 터졌다. 내 문제는 그의 글을 읽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속이 매스꺼워 진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어두움 때문인가? 어쨌든 원인을 모르는 어지러움과 구역질 때문에 원하던 대로 마음껏 읽을 수는 없었다.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갈거라고 말하는 허지웅에게서 나는 30대가 되면 되고 싶은 나의 미래상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겪는 그의 고난을 보면서, 물질적으로 만족스럽지 삶에 대한 두려움에 헛구역질이 났었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는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건 내가 그의 글을 당당히 읽을지 아니면 부끄럽게 외면할지에 대한 선택의 결론일 것이다.


ps. 가자, 그의 말대로 진짜 세계에 살고 있는 일반 시민이 되기 위하여 (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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