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풀

생각하기 2010. 8. 28. 00:30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봄이나 가을이었을거야.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낮잠이 올 정도로 선선한 날씨였으니.

그 때 나는 잔디밭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어.
산들산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잔디밭 위에 그냥 누워버리고 싶더라고 어렸을 때처럼.
근데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 거야.
잔디밭에 함부러 누웠다간 쥐똥 때문에 괴상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무서운 말이 떠올랐지.
난 여지껏 입원 한번 해본적 없고 버스에 탈 때도 안전벨트를 맬 정도로 안전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이거든.
당연히 잔디밭에 눕고 싶었지만 눕지 못하고 그냥 누워 있는 상상을 하며 서 있었어.
그렇게 한참을 잔디밭 위에 서서 있었는데 문뜩 한쪽에 난 강아지풀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정말 오랜만에 본 강아지풀이었어.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말이지.
만지면 강아지 꼬리처럼 부드럽고 친구 등뒤로 몰래 다가가서 간지럼 피우며 놀기에 딱 좋았지.

"냠냠"
그렇게 강아지풀을 손에 들고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놀다보니 어느 순간 배가 고파진거야.
그래서 먹었어.
어렸을 때 개구리 한마리, 메뚜기 한마리도 안 먹어봤지만 이건 한번 먹어보고 싶더라고.
나름 이것도 풀이니 생식이고 털 끝에 검은깨처럼 달린게 '난 웰빙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더라.
풀에서 난거라 위험할지 모르니 물에 씻어서 먹으려고 하다가 그렇게 먹으면 풀이 풀 죽을까봐 그냥 날로 먹었지.

일단 입 속에서의 느낌이 안좋았어.
검은깨에 눈이 팔려서 정작 중요한 강아지풀에 달린 털들을 잊고 있었던 거야.
입속에서 돌아다니는 털들 때문에 머리 깍다가 실수로 머리카락을 한뭉큼 먹은 듯한 느낌이 나더라고.
물론 맛도 별로였고.
만약 강아지풀이 맛있었다면 편의점에서 옥수수 수염차 대신 강아지풀차를 사 먹을 수 있었겠지?

아무튼 꽃냄새와 선선한 바람에 마냥 신난 강아지처럼 잔디밭에서 놀고 있었는데 강아지풀 하나 먹고는 풀이 죽어버렸지.
이것 저것 풀을 잘 뜯어먹는 강아지라도 내가 먹었던 강아지풀을 먹었으면 분명 맛이 없다고 했을 거야.
그리곤 분명 맛 없는 강아지풀 먹은 강아지 마냥 풀이 죽어있었겠지.

그 날 이후로 힘들 때나 피로회복(피로가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의 회복) 될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더라고.
'맛 없는 강아지풀 먹은 강아지 마냥 풀이 죽어있다.'
뭔지 모르게 재미있는 문장인 것 같아.
지금은 풀이 죽어있지만 다른 맛있는 풀들을 먹으면 금새 힘이 솓아날 거 같은 느낌도 들고.
풀이 죽어 있을 땐 머리 속으로 강아지풀 먹은 강아지를 한번 상상해봐.
그러다가 풀 죽은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리곤 스스로 웃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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