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으로부터의 사색

뒤적뒤적 2011. 1. 26. 17:00

10시 30분 수업에 가기 위해 내가 일어나는 시각은 8시 40분이다. 9시 10분에 화암동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지 못하면, 9시 30분에 문지동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10시 30분 수업을 위해 10시 30분에 문지동에서 타는 버스를 탈 수 밖에 없다. 9시 40분쯤에 학교에 도착해서 50분 정도는 수업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기웃 거린다. 스포츠 컴플렉스가 건설되는 모습도 보고, 내가 영영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신축 기숙사의 모습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구경꾼 놀이도 하루 이틀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한적한 실내에 들어가 하염없이 시간을 때운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올해 1월에 대대적으로 개편된 대전시내버스노선의 만족도가 83.3%나 된다는 설명을 본 것이다. 버스가 개편된 이후로 10분에 한대씩 오던 버스들이 20분에 한대씩으로 배차간격이 길어졌다. 당연히 유일하게 화암기숙사로 지나가는 시내버스인 918번도 20분에 한대씩 온다. 20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람 한명도 안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서 봤으면 절대 만족도 83.3%라는 말에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아마 높은 정당 지지율처럼, 시내버스도 잘 안타는 분들이 버스 색깔이 예쁘게 바뀌었다고 저렇게 말한게 분명하다.


아파트와 식당들이 있는 전민동과는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이곳으로 배달 오는 음식점은 극히 드물다. 배달을 전문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치킨집이나 피자집들은 바람을 헤치고 이곳까지 찾아오지만, 정작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을 만한 밥집은 한, 두집 빼고는 오려고 하질 않는다. 배달 해주는 곳 중 하나라고 해도 3명 이하로 시킬 때는 무척이나 눈치 보이고.


산골에 있는 기숙사답게 기숙사에는 해가 잘 들어오질 않는다. 봄이나 여름에는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은데 겨울이 되니, 동쪽에 해가 떠있는 아침을 빼고는 해를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을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는 북유럽의 겨울이 이와 같지 않을까?


이곳 기숙사도 좋은 점은 있다. 방마다 화장실이 있고, 유럽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기숙사 답지 않게 건물들이 예쁘다. (실내는 한국식으로 난방을 깔아주었으면 좋았으려만은......)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 시끄럽지도 않고 한적해서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기에 좋다.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의 주말이었다. 주말이라 평소보다 일찍 방에 들어온 나는 책상에 앉아 한가롭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목이 말라 기숙사 중앙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 좀 마시려고 방문을 나섰다. “찰칵” 그리고 “철컥“.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의 커다란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잠기고 방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한 손엔 도끼대신 물병을 들고 원시인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던 나는 굳게 닫친 방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발은 멈춰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여러 가지 상상들이 쏟아졌다. ”룸메가 돌아오려면 최소 4~5시간은 기다려야 되는데 이렇게 그냥 복도에 서있어야 하나.” ”이 복장으로 사감실까지 뛰어가서 방문을 열수 있는 키를 받아올까?“ ”아니야 그러다 사감선생님이 없으면 카트키도 없는 나는 눈 오는 이 겨울밤에 밖에서 꼼짝없이 벌벌 떨 수밖에 없어....“ ”복도 빨래대에 있는 옷들은 잠시 빌려 입고 사감실까지 갔다 올까...” 그렇게 어찌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던 사이, 아주 우연히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기숙사 복도에서 사감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내 옆방 학생이 방문이 잠겨서 사감선생님을 불렀고 그 때문에 사감선생님이 마스터키를 들고는 기숙사로 온 것 이었다. 덕분에 이 험한 화암기숙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화암기숙사를 살면서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쪽 식당 밥이 싸고 맛있다는 것이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이 적어 더 많은 정성을 쏟아 밥을 만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같은 반찬과 같은 쌀로 밥을 만들어도 이쪽 식당밥이 다른 학식 식당밥보다 훨씬 맛있다. 얼마나 맛있냐면 점심, 저녁 시간만 되면 인근 택시기사 아저씨들, 택배 기사 아저씨들까지 와서 식사를 할 정도이다. 이렇게나 맛있게 밥을 먹고는 하염없이 셔틀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아침부터 다툼이 벌어졌다. 얼마 전부터 셔틀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게 된 아저씨가 모르고 셔틀버스 운행을 한번 안한 것이다. 그 때문에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30~40명의 학생들은 30분 넘게 추위에 떨고 있었다. 다툼의 발화점은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투 때문이었다. 깜빡해서 운행을 안했지만 미안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저씨의 말투를 듣고 기분이 풀릴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시간표를 놓친 아저씨였지만, 그 말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싸움이 벌어졌고 우린 버스에 탄 채로, 싸움에 볼모 잡힌 채로 그렇게 버스에서 20분을 보내야 했다. 우린 셔틀버스를 타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는 인질이었고, 여느 인질극들이 그렇듯 인질들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1동에 있던 여학생들을 문지동으로 이주시키고 1동을 유성구 신종플루 환자 격리소로 이용한다는 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1동에 살던 학생들이 이사하기 시작했고 소문은 사실인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마다 불이 꺼져있던 1동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왔다. 불이 들어온 방들 중 유독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이 하나 있었다. 1동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이었는데 이 방은 밤이나, 아침이나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블라인드도 안쳐져 있었기에 내부가 살짝 보였는데 사람은 전혀 안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사감선생님이 못 보실 리 없는 저 방은 왜 항상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일까?


크리스마스 날 저녁이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옆방에서 틀어 놓은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왔다. 캐롤을 듣는 건 좋아하지만, 노래 하나가 무한 반복되는 것을 참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확인했다. 제대로 닫혀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 옆방 문을 확인했다. 역시 제대로 닫혀 있었다. 그 다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방 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기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고 여기는 화암기숙사니, 그냥 서로서로 양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다들 다른 기숙사로 가고 싶지만 탈락한 사람들인데 기숙사 문제로 다퉈서 뭐할까?


내 방은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다. 그래서 옷만 입고 방문을 열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오늘도 방에서 나오자 마자, 내 눈에서 닫히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급하게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에는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었지만 차도르를 썼다 한들 감춰질리 만무했다. 남자 기숙사에 들어온 여자는 부끄러워했다. 나도 부끄러워 했다. 다만, 남자는 자신감에 가득 찬 채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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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수기로 제출하려고 했던 글인데, 기숙사 짐싸느냐고 기한을 넘겨버렸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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