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나라

Acropolis 2009. 2. 4. 01:14
미신과 경제학의 차이는 객관적이고 설명가능한 과정의 유무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경제 전망을 듣기 위해 무당을 찾아간 경우와 경제학자를 찾아간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낸 다음에 전망을 내놓을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무당이 일방적으로 한 무당의 예측일뿐 중간에 과정이나 원인은 알 수 없다.
설령 그 예측이 안맞는다고 한들 우리는 무당에게 뭐라고 할말이 없다.
그는 주관적인 예측을 했을 뿐이고 객관적인 근거없는 그의 말을 믿은 것은 우리의 잘못임을 누구나 알고 있게에.

반대로 경제학자를 찾아간 경우, 그는 여러가지 객관적인 자료들과 통계들을 가지고 앞으로의 경제 전망을 말해 줄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예측을 한것이기에 어느 경제학자를 찾아가도 비슷한 전망을 듣게 될 것이다.
만약 그의 전망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 예측의 객관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거나 혹은 그가 경제를 전망하는데 썼던 방법론에 오류가 있었을 뿐이다.
즉, 그가 다시 경제를 전망하던 시점으로 돌아가도 같은 전망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자들이 뉴턴 역학을 가지고 물리 연구한 것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몇일전 SBS에서한 대통령과의 토론을 보면서 큰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경제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방안이나 방법은 전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한국도 경제가 전망이 어렵다는 이야기까진 괜찮지만,
대통령이라면 더 나아가 그에 대한 원인 분석과 방안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무당과 같은 선지력이 아니라 경제학자와 같은 객관적인 경제 전망이다.
하는 예측마다 모두 들어맞는 뛰어난 무당이라고 한들 현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부적을 만들어 주는 일이고 그게 잘 안되면 복채가 부족하다며 굿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사회에나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경제학자가 긍정적인 예측을 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예측을 한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예측은 그 예측을 만든 원인들을 알게 함으로써 미래를 좀 더 긍적적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무당이 아닌 경제학자에게 전망을 묻는 것은 미래를 미리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는가.


경제성장률이 7%에서 -4%로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는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이런 기분이 든다.
무당에게 찾아가서 점꽤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 아마 지금과 같을 거라고.
원인도 분석도 대책도 없고 단지 예측가능한(?) 미래만 존재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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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심사

사는 이야기 2008. 9. 13. 01:04

1. Android
이번 UP는 Android를 이용해서 휴대용 Application을 만드는 일이 되었다.
"모습과 행동이 인간을 닮은 로봇"이라는 Android의 말뜻이 오묘하게 끌린다.
신은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자신을 닮은 로봇을 만든다.

2. EIDF 2008
마이클 무어와 함께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EIDF.
2007에는 카탈로그도 당첨되고 EBS 본관가서 시사회도 참여하고 감상평을 통해 USB메모리까지 받았다.
올해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 비해 늘어난 상품까지는 노려보려고 작정중이다. 흐흐흐

3. SF 소설
노스트라다무스 이후로 처음으로 사람들을 떨게한(기사1, 기사2) 거대 강입자 가속기(LHC) 실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리와 다른 외계인들이 문명을 만들고 과학을 발전시키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SF소설을 써보려고 한다.
소설을 쓰려면 주변묘사와 감정묘사를 잘해야 하는데 그 방면으로는 맹꽁이 수준이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Step by Step으로 Keep going

4. 미학 오디세이
3권으로 이루어진 미학 오디세이를 다 구입해놓고 읽기 시작한지 한달정도 된 듯하다.
1권은 '평소의 나보다는 빠르게 남들보다는 조금 느리게' 읽었는데 조금은 복잡해진 2권 이후로는 진도가 안나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우선시해서 본다고 미학 오디세이에 시간 투자를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걸어다닐 때나 시간이 날때 그리고 힙합 플래야에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 볼때마다,
책에서 읽은 내용과 여러 미학자들의 주장을 놓고 문제를 비교해보고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 문제가 여러 분야에 걸쳐있고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 놀라곤 한다.
모든 인문, 사회학의 뿌리인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좋아하는 사진, 심지어 수학의 집합론에까지 영향을 비친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인 듯 싶다.

5. 토론
의견이 원활하게 개진되고 되도록이면 동어반복이 없는 새로운 토론 시스템을 갖춘 사이트를 구상 중이다.
그 시스템은 전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나의 주 목적은 정치분야에 있다.
민주주의 근본은 자유로운 토론과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지만, 우리는 토론이라는 전과정을 원활하게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인들의 말 번복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 못하고 다수가 원하는 정책이 아닌 소수의 결정에 의한 정책이 추진된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에 공포된 공식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 정치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장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우리나라의 정치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고 그 때문에 그런 사이트를 구상중이다.
하늘 꼭대기까지 바발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이 탑을 못쌓게 된 것은 언어가 달라 대화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우리가 민주주의 탑을 쌓지 못하는 것은 토론을 통한 원활한 대화를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ps. 몇가지 더 있는데 일단 각설하고 나는 지금 부모님 앞에서 양치질을 하면서 나의 건강을 자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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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가려는 시위대 왜 말리지 않는가?

생각하기 2008. 6. 8. 15:28

촛불만 들었던 시위대가 거리로 나간것까지 좋았습니다.
비록 거리로 나가서 강제연행되고 몇몇 전경들에게 방패와 군화발로 구타를 당하긴 했지만,
우리에게는 비폭력이라는 양심이 있었습니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평화롭게 하는 시위를 '시위'라고 부릅니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서로 싸우는 시위를 우리는 '폭력시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전경들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제해산 하려하지만 시위대는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시위를 '비폭력 시위'라고 부릅니다.

'비폭력 시위', 이것이 우리를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20일가까이하던 청계천 촛불 문화제에서, 20만명이 넘는 사람이 올정도로 크게된 이유는 비폭력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한명씩 연행할때마다 촛불을 든 시민는 10명씩 늘었고,
그들이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할때마다, 촛불을 든 시민은 백명, 천명씩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들을 희생시키며, 우리의 비폭력이라는 대의를 지키며, 우리의 힘을 키웠습니다.

우리를 만들고 뭉치게 한 비폭력이라는 단어를 잊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2144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NEW_GB= (68신 참조)
오마이뉴스에 그런 사진들이 실렸다면 더 이상 일부 시민들이 폭력를 사용한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직접 두 눈으로도 확인했고요.

많이 아쉽고 슬픕니다.
전경차를 끌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경차의 유리를 부시고 불 태우려는 사람들에게,
전경들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비폭력"을 외치며 말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청와대로 가는 것이 우리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하는데 더 도움이 될까요?
많은 전경버스를 끌어내리고, 시민들과 전경들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청와대로 한보 더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우리가 청와대로 한보 더 나아가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 귀에 우리 말이 더 잘 들어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2002년 월드컵 준결승 때, 시청과 광화문 일대가 아닌 상암경기장 옆에서 응원을 했다면 결승에 올라갔을 것이라도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응원했던 그 곳에서는 우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독일에게 패한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드물거라 믿습니다.
선수들은 전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장소가 어디였든 우리의 응원은 제대로 전달되기 충분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전진이 없고 정부에서는 아직까지도 대책을 내놓지 않기에 느끼는 답답함은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보 전진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올때까지 기달려주는 인내심일 것입니다.
또한 이 시간을 우리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고 내실을 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많은 시민들이 마이크를 잡고 자유연설을 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자유연설에서 한층 더 나아가 시민토론, 즉 토론의 장을 열어야 합니다.
촛불을 들고 이 사태의 해결이라는 한가지 목표로 거리에 나왔지만, 개개인 마다 목표의 범위가 각자 다릅니다.
어떤 분은 광우병문제만 해결되면 촛불시위를 그만하겠다는 분도 계실테고,
어떤 분은 이명박 정권의 모든 정책들이 맘에 안들어 그 정책들을 모두 포기할 때까지 있으려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서 두손 두발 들고 재협상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과 같이, 시민들 사이에서 충분한 토론과 하나의 확실한 목표선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광우병만 해결되면 된다는 분들은 집으로 귀가하실테고, 거리에 남아서 계속 시위를 하는 분들은 전경들에게 모두 연행될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달려가고 미래입니다.
광우병 해결, 그리고 현장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의 연행말입니다.


우리는 광우병 위험이라는 전 국민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비폭력이라는 대 원칙아래, 무기가 아닌 촛불을 들고 국민들이 모였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폭력을 당하고 살수차에 의해 촛불이 하나둘씩 꺼졌지만,
공권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꺼지는 촛불의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촛불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렇게 쉬쉬하던 언론들도 더 이상 국민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살수차를 뿌리고 강제진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힘이 커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우리를 만든 촛불을 스스로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경차를 끌어내리기 위해 들고 있던 촛불을 놓고,
전경차의 유리를 깨기 위해 들고 있던 촛불을 놓고 있습니다.

끌어내려진 전경차의 모습으로는, 깨져버린 유리창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초불을 늘릴 수 없습니다.
왜 우리의 힘을 스스로 버리려고 하십니까?
유모차를 끌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부모들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모든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만약 자신의 옆에서 촛불을 놓고 "폭력"을 사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비폭력"을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비폭력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촛불은 남을 태우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태우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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