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보는가

생각하기 2007. 6. 1. 23:10
나의 생각과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블로그에 글을 적고 있지만,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심리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사실 남들 몰래 일기를 쓰려면 다이어리나 일기장 같은데 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전에 종종 쓰긴 했다만)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일기를 읽어주지 않는다면 결국 읽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슬픈 이야기에 그칠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매일매일 일기를 쓰라고 강요를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기를 일어주는 독자가 되어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위해 글과 사진을 남기고 누군가의 사생활을 알기 위해 블로그나 싸이를 방문한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원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또 다른 트루먼 쇼를 보고 싶어한다.
그러기에 특별한 혜택도 없지만 몇명의 사람이 나를 보러 왔는지 알 수 있는 방문자수에 연연하게 된다.

활동 반경은 넓어졌고 아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정작 말을 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말보다 메신져를 통해 하는 말이 더 많을 것이다.
시험, 숙제, Quiz, 야구, 괜한 소문들 등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서 대화를 시작된 것이기에 그 일을 벗어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나만 그럴지도)
직접 만나 대화를 한다면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겠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으려면 그가 공개적으로 올리는 그 곳으로 가야한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사건들을 말하고 싶어서 그런 글들을 올리는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나를 바라봐 주세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내 마음이 끊임없이 외치기에 글을 쓰고 포스팅을 올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곳 저곳을 헤맨다.
필요한 것은 대화이지만 그럴 수 없기에 머리 속에서 대화를 만들어 간다.
나이가 하나 둘 들어가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 과거인지, 꿈이였는지 구별이 안되는 것 마냥,
직접적인 것은 없지만 간접적인 것들이 직접적인 것처럼 변해간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당신의 글을 보러가겠다.
비록 바람지역의 윈드처럼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릴 이야기일지라도.
누가 누구를 보는 것인지 모를 지라도.

Ps. 결코, 200명을 넘던 방문자숫자가 30명으로 떨어져서 이 글을 쓴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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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회

생각하기 2007. 5. 29. 23:02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재미있던 때는 초등학교 5, 6학년이였다.
방과후에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경시대회 준비를 하면서 정말 많은 추억을 남겼었다.
특히, 6학년 때 몇몇 친구들과 결성했던 '무얼회'는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경시대회 준비반이라고는 했지만 선생님께서 공부를 원하는 학생은 모두 받아주어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한학년에 6반이 있는 우리 학년에서 30명정도 되는 인원이 경시대회 준비반 인원이었을 정도로 많았다.
공부하는 반에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정해진 수업시간에 정해진 친구들끼리 만나는 것이 아닌 방과후에 남아서 다른 반의 여러 친구들과 논다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 이었다.
이 준비반에서 같이 어울려다니는 친구 몇명이 있었다.
평소에 게임을 좋아하고(나도 무척 좋아했지만)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을 만들기 좋아하는 한 친구가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모임의 이름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뜻을 품고 있는 무얼회로 정하게 되었다.

모임에서 주로 하는 활동은 경시대회반이 끝나고 학교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오뎅 또는 떡복이 또는 김말이는 먹는 것이었다.
돈이 없는 초등학생들에게 200원밖에 안하는 오뎅을 배불리 먹는 것은 사치였다.
매일 매일 5~7명정도 되는 인원이 우루루 몰려가 각자 200~500원어치씩 밖에 사 먹을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돈을 안내도 되는 오뎅 국물을 무한대로 떠먹는 것이 우리가 배를 채우는 방법이었다.
비록 매일매일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정말 즐거웠고 정말 맛있게 먹었던 같다.

배고픈 배를 어느 정도 채우면 다음에 하는 일은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노는 일이었다.
우리가 노는 놀이터는 예전 내가 살던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였다.
왜 그 포장마차가 정해졌고 노는 놀이터가 우리 아파트 놀이터가 된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친구들에게는 집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포장마차였고 놀이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가 시간이 30분이나 길어지는 친구들이 매일매일 항상 함께했다. (나는 귀가시간이 1분...)

어떤 것이 우리가 먹을 것을 먹으러 가고 놀이터에서 놀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우리가 초등학생으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은 지나갔다.
그리고 무얼회는 아쉬운 끝맺음과 함께 해체되었다.

5년동안 속마음도 전하지 못한체 끝나버린 나의 첫사랑보다 더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경시대회 준비반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우리의 무얼회는 그 해 여름과 함께 경시대회 준비반의 변화와 함께 해체되었다.
30명이 넘는 인원이 준비했던 경시대회를 이제 대표로 확정된 6명만이 공부를 하도록 준비반이 바뀌었고,
남게 된 사람과 떠나야 하는 사람이 나뉘어져 사실상 무얼회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시대회 준비반 마지막 날이 우리 무얼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무얼회의 마지막날도 특별한 거 없이 평소처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평소와는 다르게 주머니에 돈을 두둑하게 챙겨갔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포장마차에 가서 오뎅과 김말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 국물로 배를 채우고
우리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놀던 놀이터로 갔다.
하늘이 우리의 마지막을 시기했던 것인지 이상하게 날씨가 흐리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놀이터에서 노는 것은 불가능이 되어버렸고 그래도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집으로 갔다.
그러나 벌써 해가 떨어졌고 8시가 넘어버렸기에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 걱정을 하셨고 집에서 노는 것을 허가 받지 못했다.
무얼회는 그렇게 아쉬운 끝맺음과 함께 끝나버렸다.
 .
 .
 .
유치원에서 진학하면서 초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유치원의 친구들과 다 다른반이 되었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친하던 친구들과 다른 학교에 배정받게 되었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나 혼자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학교 선배와 함께 단 둘이 들어가게 되었다.

어제 싸이를 돌아다니면서 파도를 타다가 우연히 같이 무얼회였고 초등학교 때 가장 친해던 친구의 싸이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비록 다른 학교에 가고 나이가 먹으면서 10년이 가까워지도록 연락 한번 못해본 친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여름에 남겼던 추억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추억은 시간을 먹고 자라며, 그렇게 자란 추억은 다시 만났을 때 우리를 더 즐겁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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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2007. 5. 26. 00:22
의학적인 지식 또는 상식의 대부분은 쥐에 실험을 해놓고 유추해낸 결과이다.
결국 쥐에게 한 실험 결과가 사람에게도 적용 될거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쥐와는 정반대의 DNA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정보는 그 사람에게 옳지 않은 정보가 될 것이고,
쥐와 비슷한 DNA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쥐와 비슷한 사람이 더 우월해지는 쪽으로 진화가 될 것이다.

역시 쥐가 지구를 정복하게 되는 것이구나.

Ps. '고양이'를 올리고 다음 포스트가 '쥐'라니,
      포스트의 약육강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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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없는 객관식

생각하기 2007. 5. 21. 20:44

기쁠 때는 웃어야하고 슬플 때는 울어야한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일까? 요즘 잠에 쉽게 들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없어지면서 서서히 잠속으로 빠져들어야하는데 침대에 누워서 하는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면서 끝이 나지 않는다.
머리 속에서 하는 생각들은 거의 대부분이 탁상공론일 뿐이다.
그 속에서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봤자 해가 다시 뜨면 어둠과 함께 없어지는 소소한 것들이거나 아무리 생각한다고 하여도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들 뿐이다.
그럼에도 취침에서 시작된 생각들은 잠자고 있는 나에게 8분 19초전에 시작된 빛이 수시간동안 나를 비추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잠에서 깨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머리 속은 잠자기 전 복잡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머리가 이렇게 복잡하니 머리가 신체에 지시를 제대로 못내리고 있다.
할일도 많고 해야할 것도 많은 것을 알지만 머리가 생각의 바다속에 헤매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손에 잡이지 않는다.
생각을 멈추려면 최적의 답을 하나 찾아 그것을 행동하면 된다.
좋은 결과가 나오던, 나쁜 결과가 나오던 결국 일은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은 보기 하나 없는 객관식 문제들이다.
문제를 수십번 읽어보고 답을 생각해보지만, 보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에 기대어 다음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물론 세월은 잔인하게 나를 관통하고 있지만.

지금 유일하게 생각나고 기대하게 하는 일은 떨어지는 태양을 잡으러 가는 여행일 것이다.
그 여행이 1492년의 그 유명한 탐험처럼 점점 더 절실해져가고 있다.

Ps. 내게 유일한 요구르트나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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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회상

생각하기 2007. 5. 16. 03:21
지난 일년(2006년)을 회상해보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은 안타까운 한해였다.
내가 기억하던 내가 살아온 해들 중에서 최악의 한해로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1학년 때는 신입생으로 생활했던 일들이 기억이 나고
2학년 때는 전산과 신입생으로 생활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3학년 때는 기억이 나는 일이 별로 없다.

작년에 무엇을 한 것일까?
다가오는 졸업과 왜 대학원에 가는지 이유를 찾지 못함에 대한 초조함.
그리고 낭만이 없었던 나의 캠퍼스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그 전부였던 것 같다.
타의적인 시도의 실패와 자의적인 시도를 행동으로 옴기지 않음은 결국 내가 이렇게 되버린 원인이었다.
오타루에서 내려오고 SunStar에서 내려오고 NcSoft에서도 내려오면서 나의 자신감도 한 계단 한 계단씩 밟아갔다.
새로운 경험을 얻어보고자 했던 6주간의 알바는 피고용인의 서러움과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몰골이 되어버린 신체를 얻을 수 있었다.
겨울방학 때 집에서 2달동안 지내면서 5년을 넘게 밖에서 살아온 나에게 더 이상 집이란 존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공과목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을까?
교양과목을 듣지 않아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일까?
영어 수업이 없어지면서 수업의 긴장이 풀려서 일까?

끊임없는 방황과 결론이 내려지 않는 인생설계, 그리고 생기지 않는 나의 날개.

나름대로의 도전과 여러가지 실패와 아쉬움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결국 나에 대한 한탄뿐.

입학 할때의 가졌던 꿈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남은건 나의 육신뿐인가?


Ps. 한달 전쯤에 썼던 글인데, 이제서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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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 이클립스

생각하기 2007. 4. 25. 15:00
The only unbearable thing is that nothing is unbearable.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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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꼴형 인간계

생각하기 2007. 4. 16. 19:04
   나의 친분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자면 옆으로 길게 늘어진 사다리꼴 형이다. 내가 이름은 잘못 외워도 얼굴 외우는건 잘해서 그런지 평소에 안면만(!) 있어서 인사하고 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다만 말 그대로 안면만 있어서 몇년이 지나도 계속 인사만 하는 관계일 뿐이다. 어떻게 하다가 서로 인사를 하게된 사이인지도 기억이 안날 정도로 관계가 얕은 사이이다.
   두번째 단계는 일반적으로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이다. 평소 보면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특별한 일이나 모임이 있지 않을 때는 만나지 않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단계의 사람들도 상당히 많지만 두리뭉실한 인간관계를 가진 나에게는 두번째 단계의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언제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는 사이가 되버린 사람들말이다. 수란이 누나가 말해주었던, 어느 그룹에 속하지도 않고 두루친해서(?) 과대를 계속 할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넘길 사람도 없다는 말이 이 사실을 제대로 말해주는 대목인 듯 싶다.
   세번째 단계는 친한 친구사이이다. 친한 친구가 어디까지의 범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평소에 자주 대화도 하고 심심하면 같이 밥도 먹으러 가고 술도 마시고 놀기도 하는 사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평등주의자라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더 친분이 있고 없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 같은 친한 친구들일 뿐이다. (실망하지 마세요) 반대로 말해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말하라고 하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과 같다.
   마지막 단계를 꼭대기이다. 지난 20년동안 두려움이 앞서서 였는지 마땅한 사람을 못 찾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분신이자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남자이든 여자이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이나 고민을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뇌하면서 해결하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사실, 내가 누구에게 '아'라고 말할 때, 그 이면에 있는 내 머리 속에는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라는 생각을 다 해본 후이다.
   종교를 가졌다면 신이 꼭대기에 있겠지만 신은 어느 정도 믿지만 무교인 내가 신을 꼭대기에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인생의 배우자를 위해 꼭대기를 비어두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친구조차 없는 내가 그 자리가 언제 채워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인생의 배우자가 평생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강한 회의를 가지고 있는 내가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과거와의 연관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원인을 따질 필요없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니)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들어와 평생 있어 줄지도 의문이다.

   이렇게 그리고 나니 참으로 피라미드에 계층이 없다. 그러기에 나의 인간관계에 깊이라는 것은 존재 하지 않는 것 같다. 꼭대기에 누구를 올려보내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깊이 없이 만드는 것이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님, 동생, 할머니 같은 친지들과의 관계도 다를 게 없다.
   가장 슬픈 것은 내가 죽었을 때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내가 죽을 때 누구에게 나를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인가? 정보통신사회인 21세기에 사는 내가 죽어 있는 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래도 내가 받고 싶은 문자나 전화는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인데 어쩌겠는가? (트라우마의 원인)
   사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꼭대기가 비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외롭다고 단 한 사람으로 정해둔 그 자리에 아무나 올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나의 행동이 외로움을 고독으로 만들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20년 넘게 기다려왔으니 계속 찾아보는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을 찾으면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말할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행복을 만나기 전에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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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생각하기 2007. 3. 30. 00:43
사람을 움직이는 것 중 하나가 호기심이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사과를 먹게 된 것도 호기심이였고,
판도라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것도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도 하고 사건의 발생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끊이지 않는 호기심은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게 만드는 옵저버로 만든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가 본능적으로 궁금하게 된다.
그 말은 즉, 나에게 집중되어야하는 시선이 이곳 저곳으로 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 호기심이 커다란 딜레마이다.
호기심을 해결한다고 나의 상황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드믈고,
그렇다고 호기심을 상자 속에 묻어버리자니 호기심이 머리 속을 계속 맴돈다.
그래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행동을 계속 보이게 되니 참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건만, 뛰고 싶은게 나의 마음이고
마음 속에 중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거만, 변화하는 세상에 변화되는게 나의 마음이다.
정말이지 이렇게 호기심 많고 뒤죽박죽 바뀌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일까?
투컷의 말대로 나의 마음도 'Random'인 것인가?


'판도라가 불행해진 순간은 상자를 연 순간이 아니라, 상자의 존재를 알았을 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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