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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에 해당되는 글 68건
- 2008.06.04 허지웅 6
- 2008.05.31 끄적거리다
- 2008.05.14 작은 상자 속 생각
- 2008.04.17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2 1
- 2008.03.03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
- 2008.02.26 안녕히가세요
- 2008.01.19 우울함의 샘물
- 2008.01.14 이상한 이야기
- 2008.01.03 12월 30일
- 2007.12.30 썰물과 밀물
글
허지웅
내가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놓고 정작은 싫어하는 잡지 GQ. 그 잡지를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대한민국에서 이름모를 가난한 개발도상국이 되어버린다. 한벌에 천만원이 넘는 정장을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모습을 보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혼자 붕어빵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런 잡지의 칼럼리스트, 그는 분명 최소 백만원이 넘는 정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글이 CQ 같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다시 앞줄의 연행이 시작됐다. 옆에 김작가 형이 끌려갔다. 나도 끌려갔다. 어깨를 잡혀 끌려가는 도중 뒤 쪽에서 누군가 당겨 몸이 허공에 떴다.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몸이 땅에 닿자마자 군화발이 날아들었다. 머리도 잡아당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때립니까. 어휴 진짜 아파서. 그렇게 당기고 끌려 우체국 앞까지 밀려갔다. 더 이상 날 끌고 갈 의지가 없었던지, 정신을 찾고 보니 도로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 선, 어느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내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다. 왜 사람 머리를 잡아당깁니까. 아끼는 겉옷이 찢어져 걸레가 됐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검지 손톱 절반이 씹혀 너덜거리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땀을 닦다가 뺨에 온통 피가 묻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바람에 알았다. 겸연쩍었다. 나는 람보가 아니다. 그래도 꽁지머리를 지탱하던 고무줄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난 간지남인데. 어디 거울 없나. 처량해서 처연하다.
허지웅의 블로그, '25일 새벽 청계 광장' 중에서
그는 글을 잘 썼다. 다만 블로그의 분위기처럼 어둡고 쓸쓸했다. '고시원에서부터 온 편지'과 '20대가 사라졌다' 같은 몇개의 글을 더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그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고시원에 살다, 반지하빌라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란 알았다. GQ뿐만 아니라, 프리미어 같은 잡지에 기고를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의 의심도 풀렸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는 순간 행복이 사라지듯, 나의 기쁨에도 문제가 터졌다. 내 문제는 그의 글을 읽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속이 매스꺼워 진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어두움 때문인가? 어쨌든 원인을 모르는 어지러움과 구역질 때문에 원하던 대로 마음껏 읽을 수는 없었다.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갈거라고 말하는 허지웅에게서 나는 30대가 되면 되고 싶은 나의 미래상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겪는 그의 고난을 보면서, 물질적으로 만족스럽지 삶에 대한 두려움에 헛구역질이 났었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는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건 내가 그의 글을 당당히 읽을지 아니면 부끄럽게 외면할지에 대한 선택의 결론일 것이다.
ps. 가자, 그의 말대로 진짜 세계에 살고 있는 일반 시민이 되기 위하여 (08/06/04)
글
작은 상자 속 생각
이곳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심심하다.
빛도 희미하게 보이고 내 심장 소리와 공명하는 또 하나의 심장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는 나를 가둔 이 작은 방안의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닐 준비를 하려고 발길질 연습도 해본다.
언제쯤 그날이 오게 될까?
내가 작은 방에서 밖으로 나온 지도 어느덧 362일 정도가 지났다.
기대한 대로 바깥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방안 있을 때는 밖에 나가면 바로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오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1초에 한 번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고 밥을 먹으면 진이 빠져 온종일 잠만 자야했다.
수천 번 넘어진 끝에 이제야 기어다니는 것을 벗어나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롭게 걷게 되고 뛸 수도 있게 되면 새로운 것을 자주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만져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새로움의 연속이며 미래는 더 즐거울 뿐이다.
새로움을 느끼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했다.
대학에서 자유롭게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여행을 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손쉽게 친구사이가 되었다.
이제 내가 접해보지 않는 것은 작게는 몇 년 많게는 몇 십년 선배들이 계시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해보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변화를 원하고 원했지만, 그 일을 하려고 공부를 해왔지만, 드디어 내가 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선배들과 함께하는 직장생활도 즐거웠던 예전 일들처럼 기대된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더 행복한 세상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도전했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던 내가 어느 순간 변화에 대해 낫을 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고,
열심히 일한 끝에 새집과 새 차 그리고 내 아이들을 얻게 되었다.
학창시절 가지고 있던 많은 별명을 불러주는 것은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과 있을 때뿐이었다.
24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었고 몇 년에 한 번씩 바뀌는 것은 뒤에 붙는 직급뿐이다.
지구처럼 달처럼 반복적인 내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게 되었고 변화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사라졌다.
지금은 여행을 가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가고 나도 잘 아는 유명한 관광지가 좋다.
그런 관광지라면 패키지여행이 아주 많기에 유명 문화재들을 아주 편하고 빠르게 관광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주는 얼마 되지 않는 휴가에 여행하고 남은 시간 안락한 집에서 편히 쉬려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지인들을 위한 선물을 잊지 않는 것이다.
벌써 알고 지낸 지 몇 십년이나 된그들은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꼭 챙겨야 한다.
어느덧, 내가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나의 지인들도 벌써 반이나 줄어들었고 직장을 가지면서 작아졌던 나의 활동범위도 퇴직하면서 더 작아졌다.
지난 10년간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집 근처에 사는 이웃 또는 나의 아들 딸들이 낳은 손자, 손녀들뿐이다.
가끔 건강을 위해 집 밖으로 산책하러 나가지만 대부분 시간은 집안에서 보낸다.
바깥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조용하고 편안한 집이 가장 좋은 휴식처다.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한 나는 얼마 전 네모난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나 혼자밖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어둡고 고요한 이곳에 들어오니 불연 듯, 태어나기 전 엄마 집에서 살았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심심한 곳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발길질을 했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 후, 누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배웠었다.
새로움이란 내가 배 속을 나온 원동력이었고 나를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가졌던 호기심을 포기하고 새로움을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지금과 같은 어둡고 작은 상자에 갇혀 버린 게 아닐지.
글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2
첫번째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혹시 첫번째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그 글부터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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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배정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시작이 좋지는 못했다.
같은 반에서 5명밖에 안되는 친구가 같이 진학하였고, 그 중 친하던 친구들(10명) 중 아무도 나와 같은 중학교로 가지 못했다.
진학이었지만 사실상 전혀 새로운 환경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나는 3반에 배정되었다. 3개 반중에 가장 마지막 반에 배정 된 것이다.
3월 2일, 첫 수업시간에 매번 하는 행동 중 하나인 키순대로 줄서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중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고 (다른 친구들도 물론) 결국 중간쯤의 번호를 배정 받았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1번은 우리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아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착하다는 생각을 바꾸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친구였다.
예전 글(글 보기)에서 언급했듯이, 중학교는 처음으로 맞이한 혼란의 시기였다.
6년간 사귀었던 친구들과 서로 헤어져 처음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가야하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마냥 착하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어정쩡한 성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관계들은,
맑던 물통 속에 갑자기 색색의 붓들이 들어와 복잡하게 섞여져버린 듯, 쉽게 어두워지고 탁해지고 만다.
결국, 우리는 만난지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친구 한명을 왕따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느 누가 시켜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친구는 가장 키가 작았고 공부도 못했기에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우리의 표적이 된 것 뿐이었다.
서로 즐겁게 뛰어놀던 아이들은 한명을 슬프게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즐거움을 느끼던 행동들이 어느 덧 습관이 되어 버렸을 땐, 그 아이는 매일 교실에서 우는 아이가 되었다.
착하다는 이야기를 듣는게 최우선이었고 그게 몸에 베어있었던 나는 그 아이가 울때면 가서 달레주었다.
그리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행상을 받았다.
상은 받았지만, 마음이 석연치는 않았다.
나의 행동을 선행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그의 슬픔에 내가 공감해서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착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란게 더 컸다.
또한, 비록 내가 그를 위로해주긴 했지만, 나도 그가 괴롭힘을 받는 것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방관자 중 하나였다.
반 친구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를 왕따하는 분위기였지만, 나에게는 그 잘못을 막을 용기가 없었다.
나도 잘못을 알면서 그 잘못을 막지 못하는 수 많은 방관자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다.
내가 '착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덕분에 상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 때문에 나는 지쳐갔다.
2학기가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를 위로해주는 일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는 예전처럼 매일 울었고, 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를 외면한체 다수의 친구들 속에 놀았다.
착하다를 바보같다와 동일시하는 어른들을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 였다.
어떤 이 사람이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말한 사람이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었다.
도덕적인 잣대는 내팽겨쳐진지 오래였고, 오직 이익의 잣대만으로 사람들을 비교할 뿐이었다.
착하다는 것이 결국 나에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어린이 신문 1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너만 생각해라, 돈을 벌어라'라는 시대적 과업을 인식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고 하였던가?
그 날 이후로,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하기 보다 어렵던 입에서 욕을 내뱉기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중1 땐, 친구들이 나에게 욕을 한번 해보라고 하면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를 말하는 것 같은 어색한 발음 때문에 웃음을 자아냈던 내가,
이제는 한국인들이 듣고 '완벽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억양의 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한다는 건 아니고)
나는 나쁜 아이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착한 아이도 아니었다.
분명, 이 일이 없었더라도 '착한 아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아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착한 어른'라는 말은 거의 못들어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수업만 충실히 들으면 따라갈 수 있다는 초등학교 교과과정은 어린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것일까?
그것은 그 아이가 도덕적인 아이로 커나가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게 내려지는 지시나 금지를 철저히 지키기만 하면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이라는 것은 단지 지시나 금지를 지키는 것 이전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아야한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일단, 착한 아이가 되어 착하는 말과 옳고 그름 사이에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관련된 내용을 곧 포스팅 할 예정)
어른이 된 나에게 필요한 것도 어렸을 때와 같은 막연한 착함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도덕성일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 슬픔을 주게 되더라도 합당한 원칙에 의하는 도덕적인 삶.
이런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간다면,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글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
동화책나 교과서를 보면 자라나는 아이에게 착하다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백색처럼 어느 것 하나 티가 없어 보이는 이 '착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어렸을 적 나는 무척 착하게 살았다.
스스로 착했다고 말하는게 우숩긴 하지만, 머리 속에 착한 행동을 인생의 제1목표로 두고 살았으니,
아무런 생각없이, 모든 행동이나 말이 착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만큼 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착함이라는 뜻에서 벗어난 몇가지 행동들도 종종하긴 했지만 말이다.
동생이 태어나고, 방황하던 나에게 부모님이 던진 당근은 '착하다'는 말이었다.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에게 쏠려있던 관심이 동생에게 가는 이야기는 옛날에도 회자 되었고 요즘 어린이 TV에서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은 나에게 착하다는 칭찬으로 나의 생각을 돌려 놓았다.
대략 진행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1. 착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하신다.
2.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3. 칭찬을 받기 위해 계속 착한 행동만 하려고 한다.
4. 동생을 잘 보살피면, 칭찬을 해주신다.
5.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는게 착한 행동으로 각인된다.
6. 동생과 다툴일이 있으면 져버린다.
7. 결국, 착하다는게 인생의 제1목표가 되어버린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동생과 싸우는 것보다 지는편이 더 좋다고 인식을 한 후, 계속 지는 척 했던거 같다. (스스로 때리고 혼자 아픈척함)
기억의 단편으로는 가끔 화가 나서 무기를 든적이 있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속 해주시는 칭찬,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라는 말은 우리를 싸우지 못하게 했던 거 같다.
어쨌든, 숙제를 베끼기 싫어, 차라리 매를 택할 만큼 착하다는 말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그 중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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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은 2편에서.
(글을 읽을 확률과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나누었다)
글
우울함의 샘물
내가 원래 샤워를 오래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낙하하는 물 속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을 때가 많기에 남들보다 샤워를 오래하는 편이다. 그러나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내가 샤워를 끝내고 나오면서 큰 녀석이 한바퀴 돌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샤워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된 것은 내가 이곳의 샤워장을 갈 때마다 느끼는 이상한 기분 때문 일 것이다. 그 기분은 7살 때 처음 느낀 '우울함'이라는 기분이다.
이유를 모르게 이곳 샤워장에 들어가 샤워를 할때마다 '하나, 둘 셋' 주제가가 귓가에 멤돌며 그 때의 기분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나의 부모님은 맛벌이였기에 아침 일찍 출근을 하셔야 했다. 다행이도 가까운 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고 매일 아침마다 나와 동생을 위해 오셨기에 홀로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깨어나는 시각은 항상 부모님이 집을 나가는 시각이었고 깨어나자마자 나는 부모님에게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 쯤, 내가 싫어하게된 '하나, 둘, 셋' 주제가가 TV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곧 학교(병설유치원)에 가야하고 저녁이 되어 만화를 볼 시간이 되면 그 분들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매일 아침마다 우울함을 맛보아야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치원에 도착한 후에도 1~2시간 정도는 패닉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왜인지 모르게 샤워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 때의 기분 (기억으로써는 슬프진 않다)이 떠올라 한참동안 가만히 서서 혹은 바닥에 앉아서 비와 같은 물을 맞고 있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슬픈 그 녀석은 내가 샤워장을 간신히 박차고 나와 내 폐속으로 차디찬 공기가 들어올 때 비로써 사라진다.
이곳에서만 매일 느끼는 이 기분, 혹시 이곳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열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열쇠는 내 속에 내제된 트라우마, 즉 우울함의 깊은 샘물 속으로 인도하는 문의 열쇠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 열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서 계속 생활하다 보면 발견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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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기대하며 잠에 들곤 하지만, 사실 내일 아침이 조금은 두렵다.
글
이상한 이야기
근래 들어 국제 기사에서 자주 접하는 자연 재해와 관련한 뉴스들은 매년 기억에 남을 만한 대참사를 전하고 있다.2004년에 발생한 서남아시아 쓰나미는 사망 3만8백93명, 부상 1만5천2백56명, 실종 6천38명, 이재민 42만2백59명 등 막대한 인명 피해와 가옥 파손 13만5백39채, 어선 및 어항 파괴, 도로 파손, 농지 침수 등 약 1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2005년 미국을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1천2백9명의 목숨을 빼앗고 약 1백48조원의 경제적인 피해를 입혔다.국제 적십자사에 따르면 카트리나로 입은 피해액은 2005년 전체 재난 피해액의 78%를 차지할 정도였다. (출처)기사를 보면 쓰나미에 의해서 3만명이나 죽고 10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10억 달러를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좀 후하게 1:1000으로) 대략 1조원 정도 될 것이다. 자 기사를 이어서 보자. 카트리나는 1200여명이 죽고 148조원의 피해를 입었다. 수학시간에 배운 비례식에 넣어보자.
30000 : 1200 = 1 : 148 ???
뭔가 이상하다. 나라별 경제적 차이를 생각못했다. x1, x2를 계수로 넣어 대충 풀어보자.
30000*x1 : 1200*x2 = 1 : 148
4440000*x1 = 1200*x2
x1 : x2 = 1 : 3700
엉터리 가정에 엉터리 계산방법이지만, 이 이상한 방법의 결론은 서남아시아인 3700명이 모여야, 미국인 1명의 가치(정확히 말하자면 부)를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쓰나미 났을 때 우리나라가 인도네시아에 지원했던 지원금은 500만달러 정도 (발표지원금은 60만달러-> 500만달러-> 5000만달러로 늘었지만 사실상 지원은 10%정도만 했다고 함). 카트리나 태풍 피해를 입었을 때는 미국에 3000만달러를 기부해서 당당히 기부 4위에 올랐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5억달러, 그리고 미국에는 100만달러 밖에 기부를 안하는 대인배 기질을 발휘함)
글
12월 30일
새 하얀 흰눈이 가냘프게 휘날린다.
바람도 없이 따뜻하고 조용하지만 시야가 흐리다.
분명 안개는 아닐 것이다.
안개라면 동틀무렵처럼 스산했을 것이다.
내 눈 속의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서있다.
기억의 언저리를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시간 있었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웃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손을 잡아 줄 수 없었다.
따뜻함에 기쁜 나머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웃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사이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너무 오랬동안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행복감을 느꼈다.
그 때문에 계속 웃게 될 -
글
썰물과 밀물
요즘은 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듯한 감정을 자주 느낀다.
매일 2번씩 나가고 들어오는 바다인듯 썰물과 밀물이 주기적으로 밀려온다.
지구 밖 달에서 의한 것이듯 영향을 받는 것은 나지만 제어할 수가 없다.
Nell 콘서트를 보면서도 그랬다.
노래를 들으면서 박수를 치면서도 머리 속은 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이 되었다.
그 곳을 가득 채우던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공허함이 내 모든 것을 덥고 그 속에 단 한가지 생각만 하게 만든다.
아무도 없는 텅빈 그 곳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 속에서 가만히 서있다.
시간이 지나 물이 밀려온다.
물이 텅빈 나를 서서히 채운다.
밀물이기에 휩쓸려 해변가로 쓸려온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썰물.
웃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나쁘다고 말하지만 나도 어찌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머리 속을 잠식해가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달 전에 했던 말, 반년전에 했던 다짐 그리고 그보다 이전에 이곳에 적었던 글
이젠 이 모든 것들을 장담하지 못하겠다.
.
.
.
해바라기처럼 밝게 빛나는 태양을 사랑했던 그는
처음엔 나를 가슴으로 울게 만들었고
다음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곳을 나도 가장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내가 그가 되어버린것 같다.
단지 다른거라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고,
나는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도움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희망을 내어 도움을 받으러 가려고 한다.
그 사람의 1%를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느끼던 행복을 나도 느끼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