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ksy

사는 이야기 2010. 1. 14. 00:42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귀에 들리지 않는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성공한 기업들의 성공신화에서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이 성공의 비결이 되곤 하지만,
성공과의 거리가 저 멀리 떨어진 양자리와 천칭자리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쓸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 멀리 해병대 복장을 입고 서있는 사람이 황정남이라고 여기건, 황정음이 변장한 것이라고 여기건,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 깊은 관찰'이란 아무런 쓸때 없는 것이 된다.

내가 전에 봤던 점괘는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모래성을 성이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성을 쌓던 아이에게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 자신만의 성이 맞다.
1개월 전에 무너졌어야 할 성이 이제서야 무너졌다.
이제 곧 밀물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밀물과 함께 스스로 무너뜨릴려고 계획했었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물은 모래사장 너머로 빠져나갔고 나는 모래성을 부수는 것을 보류했다.
그리고 한달 뒤에 빠져나간 바닷물은 쓰나미로 돌아와 내 모래성을 덮어버렸다.

이젠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
모래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모래성 위에 꼽아놓았던 깃발만이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닐 뿐이다.
성을 부수기 전에 뽑아서 주려고 했던 저 깃발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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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0원짜리 피자 한조각

사는 이야기 2010. 1. 7. 18:10
어제 학교 피자집에서 후배와 같이 저녁으로 피자를 먹었었다.
피자를 만드는 아주머니는 주문에 쫒기고 우리는 셔틀 버스 시간에 쫒기다보니,
피자 4조각 + 콜라 2캔 값이 8400원을 내지 않고 왔다는 것을 버스에 탄 후에야 깨달았다.

행복은 짧고 슬픔은 길다.
내가 공짜로 이득을 본 행복의 가치가 열심히 일하고 손해를 본 슬픔의 가치보다 클리 없었다.
다음날, 다시 그 피자집으로가 내가 지불하지 않은 8400원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어제 계셨던 아주머니가 아닌 다른 아주머니가 일을 하고 계셨지만,
사정을 말씀드리니 무척 좋아하시고 고마워하시면서 내게 피자 한조각을 서비스로 주셨다.
귤 2개와 콜라 1캔도 같이 먹으라고 주셨고. (콜라까지 먹으면 저녁을 못먹을거 같다 먹진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른척 하고 넘어가도 될 돈인 8400원을 내고는 피자 한조각을 먹게 된 격이 되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8400원은 당연히 내야할 돈이었고 오히려 이 일 덕분에 피자 한조각을 공짜로 먹게 된 일이었다.
8400원짜리 피자 한조각이 된 것일까?? 아니면 공짜인 피자 한조각이 된 것일까?

사실 이런 의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아주머니는 "덕분에 감동을 받았다"라는 말을 연발하셨지만,
사실 나 스스로도 감동을 받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에 자기가 행복하다니, 이건 무슨 개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이 일 때문에 내 자아존중감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행복해졌다.

이슬람 율법에 보면 "하루에 최소 한가지의 착한 일을 행하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비록 내가 이슬람 신자는 아니지만,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일 매일 착한 일을 할만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길을 묻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겨울 방학 숙제를 다하고 겨울 방학을 즐기고 있는 초등학생의 기분이라고 할까? (정확히는 모른다, 그런 적이 없어서...)

그래서 결론은?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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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만에

사는 이야기 2009. 12. 21. 15:25

택시 아저씨가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벌이가 너무 안좋다며 하소연을 하셨다.
자기가 택시 운전을 한지 18년째인데 18년동안 이렇게 적게 벌리는건 처음이라고 하신다.
나도 택시 아저씨가 돈벌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24년만에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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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노래방

사는 이야기 2009. 12. 16. 22:25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266.html

홍대의 모 노래방
럭셔리 노래방이라는 이름으로 종업원이 방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다.
무릎 꿇은 사람을 존대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연스럽게 오가는 반말.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내가 모르는 내 친구였을 수 있음을 알기에.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수 있음을 알기에.

새벽 2시, 기껏해야 시급 5천원정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받게 된 월급 봉투가 그의 자존감을 채워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해 버린 자존심의 댓가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는 매일 매일 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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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

사는 이야기 2009. 11. 19. 19:15
미술, 음악사를 보면, 20대 초중반에 예술성의 절정을 보여준 예술가가 많이 있었다.
크레용을 손에서 놓은 이후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나였지만,
지금의 시기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내 예술성의 절정을 달리는 시기라고 생각이 샘솟았다.
비록 걸작은 못되더라도 그전에 그렸던 졸작과는 확연히 다른 그림을 그려낼거라는 자신감이 들었고
그러한 연유로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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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죽음

사는 이야기 2009. 11. 15. 12:24
악몽을 꾸웠다.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내가 존경하던 두 분이 정치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두 사람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이 둘이 죽고 나니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상식을 말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죽음은 단순히 사회에서 한 사람이 사라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도 하나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꿈을 꿀 정도로 겁이 많아졌고,
내 개인 GDP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예상 행복지수는 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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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외상

사는 이야기 2009. 11. 14. 10:47
스스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그 날, 그 일이 나에게 정신적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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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은행

사는 이야기 2009. 11. 4. 19:06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 주택은행이 생긴 적이 있었다.
주택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은행답게 주변에서는 볼수 없는 현대적인 건축양식을 갖춘 우람한 건물이었다.
그 곳에는 365라는 숫자가 붙어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만, 카드가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활발하게 뛰어노는 어린이라고 해도 여름과 겨울이 오면 뛰어 노는데 지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365가 적힌 그 방 앞에서 서성댔고,
제한된 문을 열수 있는 위대한 어른이 나타나면 졸졸졸 따라 들어갔다.
겨울에는 히터가 나와 따땃한고 여름엔 에어콘이 나와 시원한 낙원.
사실 에어콘은 근처에 있는 바이더웨이가 더 잘 나왔다.(3천원을 내면 어마어마하게 주는 슬러쉬 생각이 나네)
그러나 이곳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는 특별함이 있었기에 우리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지갑이 너무 무거워 정리하다보니, 내가 옛날에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카드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스에서 만난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빠는 카드도 여러장 있다"라고 말하면 애처러워 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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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9동 가는 버스

사는 이야기 2009. 11. 3. 02:19
버스가 막 서울대 정류소를 지나가던 때 였다.
시골(Non-서울)에서 올라온 촌놈에게 퇴근길의 무서움을 제대도 알려주는 만원 버스 안이었다.
이리치이고 저리치여 라면이 꼬들꼬들 익을 듯이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있을 때 두껑을 열게 만드는 고함이 들려왔다.
그 고함은 서울대 앞에서 내리지 못한 한 할머니가 빨리 버스에서 내려달라는 절규 섞인 외침이었다.
순간 비난의 화살은 할머니를 내려주지 않은 버스 기사를 향했다.
그렇지만 그 화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에게도 되돌아 갔다.
할머니의 생각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버스벨을 누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버스 기사 아저씨는 정류장에 멈추지 않은 것이었다.
빨간 색 비상망치에 손을 가져다 대며 벨을 눌렀다고 소리를 지르셨지만 망치는 망치일분 벨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거침 없어졌다.
자신은 운전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고,
자기 아들도 운전할 줄 안다며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었다.
운전면허증이 있다는 것은 주민등록증 외에 또 다른 증이 있다는 것에 불구해진 현실에서,
할머니의 말은 "우리집에 소고기 한근 있다"정도밖에 해석될 수 밖에 없었다.
덮으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오히려 덮으려는 것을 들춰내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벨을 눌렀다고 착각한 할머니,
할머니를 내려주지 못한 버스 아저씨,
그리고 만원 버스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
그들 중 이 문제의 원인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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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사는 이야기 2009. 10. 25. 17:14

사람들이 건망증이라고 부르는, 일시적으로 기억했던 것을 까먹는 일이 나에게도 종종 일어난다.
내가 겪는 건망증의 일반적인 증상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과는 다른 생각이 떠올라 앞서 생각했던 것을 까먹는 경우이다.
무의적으로 까먹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새로운 생각을 떠오르게한 자극이 컸을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슈퍼마켓에 우유를 사러가던 도중에 길에서 커다란 교통사고를 봤을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퍼마켓에 가서 우유를 사야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길을 걸아가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보고는 우유를 사야 한다는 생각을 까먹게 되는 것이다.
이걸 진화유전학적인 관점에서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진화를 통해 발전해왔다면 당연히 커다란 자극을 통해 얻은 기억을 강화시키고 작은 기억들은 지우는게 정보관리 관점에서 이득을 주는 자연선택이었을 것이다.

요즘 기억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무려 3번 연속으로 까먹은 일이 있었다.
가기 전에 기억해놓고 있었다가, 그 곳에 가면 까먹고, 그 곳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기억이 난다.
내가 왜 자꾸 까먹는 것일까, 고민고민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인듯하다.
정신줄을 놓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기에 작은 기억들이 매번 증발해버린 것이다.

다음 번에는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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