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향기

Element 2009. 12. 31. 01:07
사람이 가진 짧은 기억력을 보면 얄팝하다고 느껴질 망큼 당황하게 만들 때가 있다.
2005년에 발간된 노순택 사진가의 첫 사진집인 분단의 향기의 첫장을 넘기면서 생각났다.

내년이면 벌써 남아공 월드컵이 열린다.
2002년 여름의 뜨거웠던 기억도 식은지 벌써 오래이다.
4년 후에 가졌던 기대가 2002년과 같지 않았기에 내년 월드컵도 2002년 때와 같을 순 없을거라 직감한다.
이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각일 것이다.
그와 같은 성적을 낼수도 없을 뿐더러 그와 같은 성적을 내더라도 기쁨이 예전과 같을 순 없으리라.

2002년 겨울, 그 해 여름만큼 뜨겁진 않지만 그 것만큼 특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전에도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촛불시위"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각인하게 된 일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두 여중생의 사망, 그리고 가해자인 미군의 무죄판결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우리들 중 몇명은 종이컵에 끼운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삼삼오오 나가 모였다.
그리곤 이 사건은 일이 발생한지 6개월만에 각종 TV와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건으로 커졌다.

지난 여름, 사회에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신에만 관심있는 '개새끼'로 욕 먹던 세대가
바로 7년전 처음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인 중, 고등학생, 그들이었다.
이 모든 사실들을 나도 잊었고 우리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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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분단이라는 상황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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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We think)

Element 2009. 11. 8. 22:40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와 함께 한상기 교수님이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소개해줬던 책이다.
위에 책의 내용과 겹치는 감이 없지 않았던 점과 번역자가 번역을 재미없게 한 점,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각보다 심심하게 읽었다.

We think라는 원제처럼, 이 책에서는 웹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모으고 협업하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활동들이 단순히 웹이 나타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웹이 있기 전에도 수 많은 시도들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역사적인 자료와 함게 설명해준다.
집단지성이라는 방식이 기존의 방식들의 전부를 뒤집어 엎을 수는 없겠지만,
기존의 방식들을 대체하는 분야가 있게 될 것이고 이 두가지가 공존하는 사회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가지 신기하게 보았던 점은 온라인 게임을 집단 지성의 사례로 보았다는 것이다.
게임의 운영자는 단순히 게임이라는 도구만 제공해주었을 뿐,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캐릭터, 클랜 등은 사용자들이 게임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집단 저작물의 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무이하게 참여자들이 시간 뿐만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지출을 하는 사례라고 말한다.

"끌리고 쏠리고 들끊다"의 클레어 서키가 말했듯이,
웹을 통해 공유하고 협업해서 작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관리와 동기 제공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특히 동기의 경우는 기존 시스템(직장)에서 제공해주던 경제적 해택을 통한 동기 유발이 아닌,
사회적 명성, 사용자들의 흥미유발과 같은 비 경제적인 혜택을 줘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구절 하나를 옴긴다.

강력한 브랜드를 가진 조직은 안정된 상품과 서비스를 세계적인 규모로 창출해야 한다. 세계 어디를 가도 스타벅스, 코카콜라, 마이크로소프트는 똑같다. 이런 상황은 작업방식이 고도로 체계화된 경우에만 보증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새로운 기술과 경쟁자와 소비 트렌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새로운 기술과 경쟁자와 소비 트렌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조직은 혁신과 적응이라는 더욱 강도 높은 도전을 감당해야 한다. 혁신은 낡은 아이디어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비트는 데서, 더 나아가 규칙을 변모시키거나 깨뜨리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데서 나온다. 효율성과 혁신이라는 두 가지 압력은 직원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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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 1권

Element 2009. 10. 10. 20:50
공학도였던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다니던 어느날....(생략)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다가 누군가 반납을 안후 서가에 배치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한권을 발견하였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사진과 글이 실린 여행기였다.
가볍게 읽기 좋은 것 같아서 골랐는데, 너무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책은 짧막짧막한 글로 채워져 있는데,
글쓴이가 시간에 쫒겨가며 여행을 해서 그런지 손에 오그라드는 표현들이 많다.
순수한 이방인의 눈으로, 누가 보면 자유여행이 아닌 여행기 깃발을 따라다니면서 쓴 여행기 같다.

편집에도 문제들이 곧곧에 보인다..
어두운 색 사진 위에 검은 색 글씨를 쓰지 않나.
가로 사진을 위, 아래로 테두리 없이 붙여놔서 두 장의 사진인데 한장의 사진처럼 보이지 않나.
유령이 쓴 책 마냥, 수 많은 사진들 중에서 글쓴이나 사진가의 모습은 단 한장도 찾아볼 수 없질 않나.
글쓴이가 현지에서 그린거라고 생각했던 일러스트들도 알고보니 추후에 일러스터를 시켜서 그린 것이고.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여행책이다.
'이걸 굳이 책으로 낼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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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Element 2009. 6. 18. 23:48
뭔가 일이 손에 안잡힐때는 책을 읽는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나는 책을 한권 읽으면 한동안은 저자처럼 생각하고 생활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미학 오디세이를 읽고 있다면, 그 책을 읽는 동안에는 미학에 대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독서가 가장 좋은 간접체험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바꾸어 경험하려고 한다.
책을 읽은지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그러한 효과는 사라진다는게 문제지만.

어쟀든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고른 책이 바로 저 기분 나쁜 제목의 '인간 실격'이다.
저 책을 왜 골랐냐고 물은다면, 카라처럼 당당하게 걸으면서 "민음사 전집중에 얇은 책이 저거 였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별 이유는 없었다.
지금 책 읽기 대기열에 들어있는 책들이 너무 두꺼워서 도무지 기분 전환이 안되었기에 얇은 책이 필요했을 뿐이다.

책은 지은이인 오사무 다자이의 실제 일생을 중심으로 약간의 허구가 섞여있는 식이다.
이를 테면, 10명의 형제중 막내로 태어난 주인공이라던가(지은이는 11명의 형제중 10번재로 태어남),
21살에 첫 자살을 실행해서 같이 자실한 여자만 죽고 자신은 자살방조로 기소되었던 이야기라던가,
대부분의 그의 일생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초반 -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난 주인공이지만 그의 익살스러운 행동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들 때문에 완전히 몰입.
중반 - 애가 서서히 이상해져 가면서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무서워지고 있음. 지금은 무서워서 제대로 못읽겠음 ㄷㄷㄷ

위에 글은 책을 보면서 적어놨던 내용들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초반의 몰입도가 강했다.
그리고 그 몰입도는 주인공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가면서 후반 내용에 대한 무서움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 어제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본 영화가 록키 발보아다.
록키에서 실베스타 스탤론이 승부에서는 질지언정 인생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인간 실격에서 요조는, 즉 지은이인 오사무 다자이는, 인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착한 인간이기에 인간임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인간상의 절정을 보여준다.

사실 역사를 보면 도무지 정의가 승리했고 아름다움이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런 비인간적인 과정들을 딛고 일어서서 지금의 인류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놀랍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내가 희망하는 꿈의 본질은 똑같은 것 같다.
세상을 위한 또 하나의 진보.
그것 마치고 세상을 떠나야 후회 없는 삶이라 말할 것이다.


ps. 예전에 홍대 3대 미녀로 불리는 요조가 인간 실격의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기사를 본게 생각난다.
ps2. 자살을 긍정하고 긍지로 여기는 일본 문화에 대해 공부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특히, 독일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역사인식이 정반대인 이유 중에 하나가 저기에 있을 것도 같다. 자살을 할 일본군들은 신사에서 참배를 받는 신화가 되었지만, 뉘른베르그에서 전범재판을 반은 나치들은 죄인이 된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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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Element 2009. 6. 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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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혜성 같이 등장하여 각종 올해의 책 부문을 휩쓸고는 2008년 하나의 아이콘의 되어버린 '88만원세대'. 베스트셀러를 싫어하고 안 읽으려고 하는 내 독서 습관이 그렇듯이, 나 스스로 여기에 쓰인 88만원세대를 여러번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저 책을 읽지 않고 오다가 결국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책의 소감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제서야 이 책을 읽은 것일까?", 이 문장 하나로 표현 될 수 있겠다. 조금 더 빨리 읽었다면 내가 속해있는 현 20대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대책이 있을 수 있는 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은 지금 20대들이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 처한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다. "이대로 가다간 20대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이 책을 읽은 내 친구는 이러한 표현들이 때문에 이 책으로부터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88만원세대 이전에는 현 20대가 처한 문제점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덕분에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발판 위에 함께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부모로부터의 물질적인 독립과 삶의 안정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88만원세대의 문제는 더 이상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되는 문제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다면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남미의 국가들처럼 되고 말 것이다.


내가 88만원 세대를 보면서 느낀건데
세대를 잘 태어나야 할거 같아
그런데 우리는 가장 안좋은 세대에 태어났잖아
아마, 우리는 비정규직 밖에 안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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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표류기

Element 2009. 4. 20. 20:59
내가 글쓰기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허지웅이다.
예전 썼던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글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재미와 생각을 동시에 주는 놀라운 매력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그의 책을 사게 된것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지웅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두 단어로 말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와 "슬픔"

허지웅은 글을 재미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유식함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가 아닌 읽는 이들의 재미를 느끼기 위한 수사를 쓴다.
그와 동시에 그 재미는 현재 시대상황을 풍자한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슬픔이었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고시원 방이 좁은 건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1-2평 남짓의 작은 골방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바닥에 누우려면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야 다리를 온전히 다 뻗을 수 있다는 것 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 거대한 나무뿌리처럼 기둥하나가 서있을 거야, 라는 말 따윈 들어본 적이 없다. 여러모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내가 니 애미다"라고 말해놓고 아차, 싶은 다스 베이더의 심정이다. 여기서 자려면 복부에 구멍을 만들던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기둥을 안고 자던지 해야겠다. 직립보행을 포기한 짐승의 눈빛으로 원장을 향해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원장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에어컨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게 15만원짜리 방이고. 다른 방은 20만원부터 시작이야."

그의 글은 현 20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논스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천국 같은 20대의 모습이 아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수 많은 차들 중 단 하나도 가질 수 없는 20대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그에게서 슬픔을 느꼈던 이유는 그의 글 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20대인 나 자신에게 있었다.

슬픔이 사라졌다.
허지웅 블로그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책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글이었다.
(단 한가지 글은 확실히 블로그에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이 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살만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의 글을 읽었을 때는 예전과 같은 슬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처한 상황, 즉 지금 20대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모습들이 지금은 슬프다고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년 생긴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예전에는 비극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던 내용들이 이제는 현실 그 자체로 인식하기에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왜 나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뚜벅이로 다녀야 하지?"라는 우울한 질문을 했다면,
이제는 "원래 20대의 삶이란 그러하다. 내 스스로 집을 마련하고 내 힘으로 나 하나를 먹여살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라는 식이다.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낙관적이라는 말과 긍정적이라는 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긍정이라는 안 좋은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보는 방향이지, 현 상황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은 착하고 멋지시네요"라고 말한다고 한들,
내가 착했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은 것처럼.
우리 세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있어야지만 그에 대한 대안과 방안을 찾아내 진정한 긍정을 이끌 수 있다.


......(생략)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평균적인 삶이라는 허상을 좇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기는 습관이나 저기 저 거대한 우주의 시크릿,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이나 저기 저 거대한 우주의 시크릿, 혹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습관 따위 몰라도 건강하게 살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합니다.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거지요. 산속에 들어가서 풀뿌리 캐 먹고 살자는 게 아니고요, 그저 소박하게 남들 다 하는 거 꼭 다 할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살자는 겁니다.
   이런 결론에 닿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아마도 20대 전부를 통틀어 이 고민을 푸는 데 쓴 것 같네요. 선택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다들 부채 위에 아슬아슬 쌓아 올린 세상의 빤한 삶으로 어서 들어오시라, 손짓만 했을 뿐이거든요.

나는 종교가 없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이야기를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마다 율법이 다르고 숭배하는 얼굴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이야기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착하고 선하게 살라"

성공에 대한 경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의 기준으로 보기엔 허지웅의 말은 다소 이상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인류의 97%가 믿는다는 종교들에서 한결 같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를 지킨다는 아주 평범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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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상식사전(미완)

Element 2009. 3. 1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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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위트는 이 책엔 아무런 위트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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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진을 보는 눈

Element 2009. 1. 5. 12:35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한 카르티에 브레송,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로버트 카파. 사람들이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모두 근대사진작가들이다. 왜곡이나 조작없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담는다는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을 존중했던 사진가들, 우리는 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현대사진은 피카소 이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를 포기해버린 현대예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외면을 받았다.
   나는 사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던 다큐멘터리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을 수는 있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 할 순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왜 사진가들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쉽게 이해하는 사진을 버리고 현대사진으로 가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책 안에 있었다.

   책은 두껍지 않은데 내용은 쉽지 않았다. 현대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예술이 왜 추상성과 오브제화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은 독자들도 이해 시키기 위해서 다양하고 많은 설명을 넣는 방식을 채웠다.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책이 될 수 없었다. (덕분에 책을 한 3~4개월동안 읽은 듯 하다 -ㅁ-).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보조자료였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진에 대한 영감을 얻는 계기 되었다.
   유일한 단점은 Chapter 14에서 나온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초판이 1988년에 나온거라 그런지는 몰라도 (읽고 있는 건 2003년 개정판) AIDS -> 동성애자 -> 병리적&퇴폐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설명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전까지는 개방성과 포횽력을 말하면서 현대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위와 한계가 없는 예술을 이해하고 그걸 포횽해야 한다고 말해왔던 저자가 갑자기 동성애자를 AIDS의 화신이자 퇴폐성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실 동성애자가 AIDS를 만들었다는 낭설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긴 하지만 사실 이성애자의 AIDS비율이 동성애자의 AIDS비율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은 벌써 통계적으로 나온 결과이다. 병이 아닌 신체적 차이인 동성애를 저렇게 말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사진에서도 있는 현실을 그대로 찍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결국에는 사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작가의 생각이나 주장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사랑노래가 많은 것이 그 마음을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 할 수 없어서 인것처럼, 사진을 찍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목적인 대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난 무엇을 찍고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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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Element 2008. 10. 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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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 김성곤(살림지식총서168)

얼마 전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대부분을 악평으로 가득채웠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명작 소설 반열에 올라갔는지 이해가 안된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해서 읽었고.
여기서 내 의문의 해답을 찾았고 이 책에 대한 악평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50년대의 미국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적 괴리가 가장 크긴 했지만,
샐린저 문학의 지향점과 그의 나머지 작품들을 간간히 소개 받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추천함)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목록에 들어갈거 같진 않다.
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번역에 대한 악평은 그대로 유지다. (귀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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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Element 2008. 9. 9. 17:20
   재미도 없고 교훈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 책에서 내가 느낀 유일한 장점은 민음사 판 책은 들고 다니기 편하다는 것 하나였다. 그 하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나는 서울을 갈 때나 집에 갈 때 항상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심지어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들고 다니면서 읽었고 아마 내가 앉아서 읽은 분량보다 이동하면서 읽은 분량이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장점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신랄한 비판에 들어가겠다.
   일단 나만의 생각뿐만 아니라 책을 읽은 여러 사람의 리뷰를 종합해본 결과, 이 책은 내가 읽기에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청소년 성장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은 초반부터 종반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주인공 홀든의 불평소리는 가뜩이나 뉴스들로 심란한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지적인 대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이 지적인 대화(서로 충분한 사전지식이 필요한)를 하려고 하면 어려운 말을 하고 지겨운 소리만 한다면서 핀잔을 부린다. 그건 아마 어느덧 나이를 먹어버린 내가 사춘기를 겪는 고등학생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1940년도에 태어나신 분과의 시대차이일지도.

   유통기한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원작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책의 번역이 거지 같았다. 작품의 후반에 홀든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을 찾아가 그 선생님 댁에서 잠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없이 우울한 홀든에게도 좋은 선생님이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대목이었는데 갑자기 그 선생님이 자고 있는 홀든의 '귀두'를 만지면서 소설은 청소년 성장소설에서 청소년 성범죄소설로 급변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전계였다. 새벽에 전화한 홀든의 전화를 아무런 짜증 없이 받고 홀든을 위해 좋은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해준 선생님이 갑자기 성범죄자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홀든은 그 일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선생님께 서둘러 인사를 올린 후 그 집에서 뛰쳐나온다. 방황하던 홀든이 좋은 선생님 덕분에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홀든 식으로 말하자면) 빌어먹을 따분하기만한 고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기차역에서 혼자 생각을 하던 홀든은 선생님께 너무 무례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자는 학생의 머리를 만지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고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을 거 같은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마음을 먹는다. 분명히, 앞에서 선생님이 '귀두'를 만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머리를 만진 것으로 내용이 바뀌어 버렸다. 둘 다 머리지만 그 머리와 이 머리는 판이하다.
   한 권의 책 속에서 주인공이 몇 페이지를 두고 주장을 번복하자 책에 대해 의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의심은 민음사 판 번역자의 실수로 판명났다. 앞에서 나온 '귀두'는 원서에서 'Head'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자가 홀든이 느낀 성적수치감을 좀 더 실감 나게 표현하려고 '귀두'로 번역해버렸다. 이렇게 치명적인 번역실수가 드러나는 곳은 이 장면이 끝이 아니다.
   작품 종반에 홀든이 집으로 몰래 들어가 여동생인 피비와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라고 할 수 있어! 분명히 그래. 어째서 아니라고 하는 거니? 정말 사람들은 실제적인 걸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정말 환장하겠다"라고 홀든이 말하자. 피비는 "그렇게 욕 좀 하지마. 좋아. 그럼 다른걸 말해 줘.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 건지 말이야. 예를 들면 과학자나 변호사 같은 거"라고 말한다. 욕도 안 했는데 피비가 "욕 좀 하지마"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청소년권장도서로 선정돼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도 청소년에 맞춰 자체검열을 한 것인지 욕도 안 했는데 욕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었다. 아마 초반부터 홀든의 대화나 회상 대부분은 욕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욕은 교묘하게 숨겨버린 채 주인공을 욕도 안 하는 선량한 학생으로 만들어버렸다. 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중요한데 번역자 마음대로 소설 속 상황을 변질시켜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책을 읽을수록 철 없고 바보 같은 홀든이 지금의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인 사람과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보다는 지적인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지적인 대화보다는 즐거운 대화를 원한다. 더군다나 지적이지도 못하다 (책은 언제 읽나? ㅠㅠ). 불의를 알지만 참는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 속에서는 슈퍼맨처럼 당당하다. 물질적인 욕심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스스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 속에 살고 있다. 결국, 홀든에 했던 나의 비난은 책의 중반 이후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딱 누워서 침 뱉기.
   나쁘기 만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웃으면서도, 순수하다고 또 한 번 웃는다.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세상 모든 동전에 앞면과 뒷면,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명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적어준 앤톨리니 선생(앞에서 언급한)이 적어준 쪽지는 어떤 사람에게는 교훈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에게는 (다시 홀든 식으로 말하자면) 구역질이 난다. 인식의 차이도 있겠지만 묵묵하게 일한다는 것은 고대에는 노예에게, 중세에는 농노에게 그리고 근대에는 노동자에게 갑이 해줄 만한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일하게 즐거웠던 것은 홀든의 여동생 피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순수하면서도 여자아이처럼 귀여우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배려심까지 가진 엄마친구여동생 같은 인물이었다. 피비를 보면서(읽으면서) 나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그럴 때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택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일까.

ps. 오랜만에 맞춤법검사를 해봤는데 또 다시 폭탄을 맞았다. 블로그에 글 쓸때도 한글로 먼저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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